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풍경이 있다. 5.18광주항쟁의 기억이 그렇다. 40년이 지났지만 잊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사태는 5월 17일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시내에 깔리고 이런 저런 소문이 난무했다. 21일. 그날은 초파일이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이 손수레에 실려 시내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날, 도청 앞 금남로에서 군인들의 발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피를 본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날 저녁 최루탄 연기 자욱한 금남로 거리는 데모대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광주의 진실을 밖으로 알리는 게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외신 기자가 시내 모처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온 교수를 만났다. 저녁에 둘이서 그 여관을 찾아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알리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외신기자가 무슨 이유로 숙소를 옮긴 통에 그 계획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나와 그 교수의 삶을 통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도청 앞 분수대 앞으로 매일 사람들이 몰려왔다. 분수대는 민주의 광장이었다. 바로 옆 상무대는 시신 안치소였다. 죽은 사람은 모두 그곳으로 운구한 다음 신원확인을 거쳐 망월동 묘지로 옮겨졌다. 양동 시장 상인들은 시위대를 위해 매일 김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그 모든 장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8월 27일. 그날 군인이 도청을 접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잠결에 총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한 여인의 다급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나와서 여러분의 아들딸들을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가만히 나와 담 너머로 보니 거리는 섬뜩한 어둠이 점령해있었다. 잠시 후 헬리곱터가 선무방송을 시작했다."시민여러분, 밖으로 나오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폭도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내가 이불을 둘러쓰고 엎드려 있는 동안에도 총소리는 계속되었다. 탕, 소리 하나에 한 목숨이. 탕탕, 소리 둘에 또 한 생명이…. 그날 그렇게 우리 국군의 총에 꽃 같은 젊은이들이 숨져갔다.
1984년, 미국에 건너왔다. 많은 분들이 광주의 진실에 대해 물었다. 본 대로 겪은 대로 얘기를 해 주어도 반신반의했다. 설마 우리 군인이 학생과 비무장 민간인을 그렇게 죽이겠냐고 믿으려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그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며칠 전, 5.18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공식 활동이 시작됐다고 한다. 조사위는 발포 책임자 및 경위. 집단 학살 등을 앞으로 3년간 조사한다고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제대로 조사해서 꼭 진실을 밝혀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