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옮기면서 공기청정기를 새로 들여놓았다. 모양도 날렵하고 소리도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집에 있을 때나 밖에 나갈 때나 항상 켜 놓았다. 집안 공기가 좋으면 푸른색, 조금 나쁘면 황색, 아주 나쁘면 빨간 등이 들어온다.
얼마 전부터 밖에 나갔다 집안에 들어서면 공기청정기의 청색이 갑자기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 모터 소리도 커진다. 내가 들어오면 집안 공기가 나빠지다니. 그 원인이 내 자신인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존재가 곧 공해였다. ‘나의 청정지역에 미세먼지와 세균을 잔뜩 거느리고 당신이 들어왔소. 외출복을 갈아입는 것, 전기 코드를 꽂고 커피를 내리는 것 모두가 내겐 공해요. 그래서 붉은 등을 켜며 목청을 돋우어 싫은 내색을 하는 것이오.’
나는 푸른 세상에 분위기 메이커가 아닌 분위기 브레이커로 왔나 보다. 맑은 호수에 세사(世事)의 잡동사니를 잔뜩 둘러메고 첨벙 굴러떨어진 돌. 어쩌면 내 존재가 이 지구에 착지하는 순간부터 대지는 자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서너 살 무렵이다. 당시엔 아이들이 집을 한 번 잃어버리면 그 길로 미아가 되는 일이 예사였다. 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 어른들은 그래서 아이들이 철도 나기 전부터 우격다짐으로 사는 집 주소를 따로 외우게 했다. 그 무렵 지척에 사는 고모가 우리 집에 들렀다.
"얘, 너 길에서 집을 잃어버려 낯선 사람한테 잡혀갔는데 누가 집 주소를 물으면 뭐라고 할래?”
그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내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내 바로 위로 태어난 딸이 애보기 언니 등에 업힌 채로 어딘가로 끌려간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까지 동원되어 사흘 만에 화교촌에 납치되었던 아이를 찾았다. 아무것도 못 먹어 탈진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젊은 어머니는 품에 안고 젖을 먹였다. 오래도록 힘겹게 젖을 빨던 아이는 방안 하나 가득 설사를 하더니 그대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모가 우리 집의 뇌관을 건드렸다. 어머니의 아픈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그 봄날 고모는 집 주소를 외우고 있을 리 없는 어린 조카를 난처하게 할 심산이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또렷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주소를 알고 있었으면 왜 집을 잃어버렸겠어?”
그 무렵 늦도록 말문이 트이지 않아 어머니를 애태우던 내가 뜻밖에도 한 문장을 정확하게, 그것도 힐난조로 구사하자 슬픔으로 일그러졌던 어머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고 한다. 반전이었다. 그 뒤에도 종종 어머니의 ‘속을 뒤집던’ 고모는 전쟁 전에 시댁이 있는 북쪽으로 시집을 가서 그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
아버지는 자주 먼 북녘 하늘 너머로 눈길을 보내시곤 했다. 어머니에겐 공해 수준이던 고모가 아버지에겐 그리운 혈육이었다. 어머니에겐 매사에 붉은 등이던 시누이가 아버지에겐 애틋하고 청정한 푸른 등이었음을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