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석사

                                                                                                                

 마흔살이 훌쩍 넘어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큰아들 또래 이십 대 초반의 재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간호 과목을 수강했다. 거기에 앉아 있는 학생 중에서 나이도 가장 많았고 결혼해서 아이를 셋이나 둔 동양인으로 소수인종에 속했지만 ‘So what?’하며 오히려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그 당시 미국에 온 지 22,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간호대에 들어가기 위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한과목씩 시작해서 필수과목을 듣는데 거의 3년이나 걸렸다면 믿어질까.

  막내가 태어나서 백일도 안되어 9/11을 지켜보았다. 없는 세상이지 않은가. 뉴욕 참사의 희생자 중에는 이렇듯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하면서 아마도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 같았다. 그런 반드시 비극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남편에게 의지하는 데서 조금씩 독립해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기 전에 유학생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피츠버그로 왔다. 결혼생활이나 남편에 대한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하릴없이 살면서 우울증을 호되게 앓았다

그래서 못다한 일을 찾아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 석사논문을 마쳤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년 후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인터넷의 역사가 열리는 시절을 두번째 대학원에서 보냈다. 입학할 당시에 컴퓨터를 켤 줄도 모르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고 긴장이 되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세계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논쟁하며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이 신선했고 부러웠다. 졸업 후, 웹디자이너가 되어 몇년간 프리랜서로 비영리 단체 웹사이트 만드는 일을 했다. 일하느라 두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지만 늘 미안했다.“너희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몇 년 있으면 집을 떠날 텐데 그 전에 엄마에게 원하는 걸 말해봐하자 여동생을 원한다고 해서 얼마든지 낳아줄 수 있지라고 장담했지만 막내도 역시 아들이었다. 큰아들과 막내는 열다섯살 차이가 나고 둘째와는 열두살 차이였다. 그들은 최고의 베이비시터였다.

 

막내가 한살이 되면서 난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갖고 있던 석사 두개가 미국에 살기 위해선 왠만한 직장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의 학업에 연연해 하지 말고 쓸데없는 자만심에서도 탈출하기로 했다. 여태 얼마만큼 공부를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서 100세 시대를 준비할 것인가가 훨씬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어릴 적 여러개의 꿈 중의 하나는 간호사였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간호 공부를 하는 동안 첫째는 대학교에 입학했고 둘째는 바쁜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막내와 잘 놀아주었으며 모두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잘 커주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데 익숙했고 집안 정리도 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가능한 여름에는 경주와 민속촌, 민속 박물관 등등을 방문했고 어른에 대한 공경도 자연스레 배웠다. 또한 예절과 문화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정식 간호사가 되기까지 병원에서 간호보조사로 9개월동안 일하면서 간호대학 졸업 시험도 치르고 간호사 시험(NCLEX)도 한번에 통과했다. 간호사로 고용되어 신경중증, 중풍, 뇌암, 척추암, 트라우마 등등의 환자를 돌보는 병동에서 하루에 12시간 반 이상, 2주일에 80시간 이상을 돌보았다. 온 몸과 온 마음을 완전히 소진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못된 환자에게 발길질을 당해 유산된 간호보조사의 경험담을 듣고 간호사 동료들이 정신이 혼미한 환자에게 뺨을 맞는 것도 목격했다. 300 파운드가 넘는 환자들을 옮기다가 허리를 다친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도 있었고 간혹 병원균을 가진 환자에게 감염되는 경우를 보며 마음 아팠다. 아무래도 평생 직업으로는 솔직히 역부족이고 어려울 것 같았다.

 

병원에서 풀타임으로 거의 9년을 보내면서 간호 대학원을 거의 5년에 걸쳐 졸업하고 첫번째 고시에서 실패하고 두번째 시험에 합격하여 Family Nurse Practitioner(FNP)가 되었다. 그 후 파트타임으로 가정방문 하는 일을 했는데 환자를 돌보는 일 보다는 그들의 거처를 찾는 시간이 더 걸렸고, 그다지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몇달에 걸쳐 거의 70장 이상의 이력서를 내고 수차례의 인터뷰를 마친 후, 마침내 풀타임 직장을 갖게 된지 3년째다. 대학원 시절에 미래의 의술치료는 원격의료가 맡게 될 거라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 마침내 원격의료 (Telemedicine)로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도 비디오를 통해서나 온라인으로 치료해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환자의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방문을 받고 진단과 함께 처방전을 환자의 약국에 반시간도 안되어 자동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원격치료는 무척 편리하고 효율적이라서 미국내에서 비교적 빨리 대중화가 되어가고 있다.

 

석사가 셋이나 있는 것이 조금도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머나먼 여정이었다. 물론 남편의 끝없는 뒷받침으로, 특별히 세 아들이 함께 해주어 견딜 수 있었고 캄캄하고 기나긴 터널을 건널 수 있었다

아들의 성적표와 나의 성적표를 비교하며 엄마보다 훨씬 나은 아들의 성적에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제대로 된 시민정신을 발휘한다면 차별은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간호과정 뿐 아니라 세번째 석사과정 동안 써야했던 수십편에 이르는 나의 페이퍼를 아들들은 감수하고 수정하고 정성껏 봐주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밤낮 바꿔가며 일하고 학교 다니며 종이 몇 장을 메꾸는 논술은 늘 자신이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아들들이 도맡아 주었다. 여러가지 병리와 의술에 관한 내용의 글을 읽고 고쳐주면서 막내는 의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의사가 되겠다고 한다.

살아가는데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기술을 익히고 설득을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아이들에게 자주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공부를 했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고 생각한다. 큰아들은 소아과 전문 치과의 공부를 몇달 후에 마치게 되고, 둘째는 직장을 다니면서 석사를 마치고 워싱턴 디시에서 한국 정부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막내는 이제 대학 1학년에 재학중이다.

 

언제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