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에 불이 나간다면

 

 

신순희

 

 

그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평소 깨닫지 못하는 전기에 대해 감사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완벽한 저녁 준비가 끝났다. 칠면조는 다 구워져 오븐에서 기다리고 있다. 느끼하지 않게 매콤한 오징어볶음과 시금치 된장국도 있는 퓨전 식탁이다. 이제 손님이 가져올 음식이 곁들여지면 각자의 마음만큼 풍성한 식탁이 되겠다.

 

딩동하고 울리는 낭랑한 소리, 약속한 대로 다섯 시에 초대 손님이 도착했다. 활기찬 바람을 몰고 따뜻한 옷차림으로 들어선다. 잠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 또다시 벨이 울리고, 그때마다 반가움이 늘어난다.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훈훈한 저녁 모임이 될 것이다. 한국 추석에 비길만한 미국 최대의 명절을 이웃과 함께할 수 있어 좋다.

 

국을 데워야겠다. 스토브에 스위치를 누르려는 순간, ‘소리가 났다. 아니 웬일인가, 전기가 나가다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추수감사절 저녁에 불이 나가면 어쩌란 말이냐. 밖을 내다보니 동네가 암흑천지다. 라이터를 켰다. 초가 어디 있더라, 이럴 때를 대비해서 초를 준비해 두었는데….여기 있다있는대로 초를 꺼냈다. 길쭉하게 창백한 초, 붉은 초, 푸른 초, 둥글게 살찐 초, 그리고 촛대들. 식탁에 초를 밝히고 거실에 부엌에 현관에 촛불이 일렁인다. 생김새는 달라도 같은 불로 타오른다. 한마음이다.

 

다행이다. 음식을 다 만들어 놓았으니. 칠면조를 굽는 도중에 불이 나갔으면 어찌할 뻔 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먹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일찍 서두르길 잘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밥을 푸고 국을 떴다. 촛불을 밝힌 식탁에 앉은 사람들 모습이 희미하다. 칠면조는 그늘진 모양으로 식탁 중심에 통째로 놓여져 있다. 이 집에 십 년을 더 살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다. 어디나 이변은 있는 법. 어둠을 밝히는 촛불 아래서 포도주잔을 높이 들고 우리는 먹는다. 해피 생스기빙데이!

 

서서히 촛불에 익숙해져 주위가 밝아져 간다. 손님들은 온화한 불빛 아래 서로를 바라본다. 음식을 나눌수록 대화가 무르익는다. 불 좀 나갔다고 대수냐.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언제 또 이런 분위기에서 밥 먹는 일이 생길쏘냐. 촛불 아래 식탁이 은은한 정감을 일으킨다. 가을을 보내고 겨울에 선 우리는 촛불을 켠다. 녹아내린 초의 키가 줄어든다. 저 초가 다 녹아내리기 전에 불이 들어와야 할 텐데, 조금 불안해진다. 불편할 텐데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저녁을 먹는 사람들, 익숙한 얼굴만큼 당황하지도 않는다. 감사하다.

 

밤하늘을 보았다. 웬 별이 그리 총총할까. 평소엔 몰랐다. 자그마한 외등 하나가 별빛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아주 희미한 불빛 하나라도 없어야 별이 그 빛의 진가를 발휘하는구나. 내 작은 불빛이 남의 빛을 가린다. 별을 보려면 나를 감추어야 한다. 사막에 별이 쏟아지는 것도 바닷가에 별이 쏟아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불 나간 밤하늘에 무수한 별이 빛나고 있다.

 

불은 언제 들어오려나. 정전이 생각보다 오래간다. 화장실에 초를 들고가는 손님을 보자니 민망하다. 아무리 비상이라 해도 추수감사절 디너 시간에 전기공사를 할까. 게다가 정전지역이 겨우 열 가구 정도밖에 안 된다. 집집마다 오븐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불이 나갔을까. 슬슬 추워지기 시작한다. 난방이 식어가고 있다. 언뜻 건너편 집 창에 불빛이 새어 나온다. 혹시 우리 집만 불이 나간 건 아닌가, 쓸데없는 의심에 다시 한번 확인해 보지만 그건 아니다. 어둠 속 촛불의 힘은 대단하다. 저 집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촛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다. 초를 아껴야겠다. 현관 앞에 켜둔 초 하나를 껐다. 마음 하나를 껐다.

 

깜빡깜빡라디오 전자시계의 숫자가 움직이더니 불이 들어왔다. 현관 앞 초를 끄자마자 들어온 전깃불에 눈이 부시다. 갑자기 사람들 얼굴이 낯설다. 어쩐지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쑥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몇 시간 동안 촛불에 익숙해졌다고 전깃불이 낯설다니, 촛불보다 더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동안 식은 실내를 덥히느라 보일러가 열렬히 돈다. 공기가 따뜻해진다. 가슴도 포근해진다. 제 역할을 다한 여러 모양의 초들은 탁자에 모여 있다. 잘 간수해 두어야지. 살면서 전기가 나가는 일은 또 있을 테니.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밤, 차가운 밤에 전기공사를 해준, 아마도 칠면조 고기를 먹다 말고 출동했을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추수감사절 나눔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긴 날이다. 아무 문제없이 저녁 식탁을 맞이했다면 이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불 나간 게 오히려 감사하다.

 

 

[2014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