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동창 작품
그 사람이 옷이다
살이 없는 나는 옷을 많이 껴입는 편이다. 긴 소매 옷을 즐겨 입는다. 또 늘 목이 시려 스카프로 목을 감싼다. 철 따라 기후 따라 목은 늘 춥다. 스카프 종류가 아주 많다. 멋을 부리며 유행을 좇는 쪽으로 날 보기도 한다. 모든 게 편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신발도 굽이 낮고 신기 쉬운 쪽을 선택한다. 체온 조절이라는 기본 생리 현상을 우선으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입고 신는다.
일단 사람은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다른 동물에 비해 거의 털이 없다. 맨몸으로는 체열 손실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목부터 감싸서 어느 정도 막는다. 나는 얇은 옷 여러 벌을 껴입기도 겨울철에는 내의를 입고 따뜻하게 체온을 유지한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믿으면서 옷의 기능을 고맙게 여기는 저체온의 뿌리 체질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옷이 있다. 내게 입혀진 내 자리라는 지금의 ‘옷’이 있어 살피게 된다. 가정에서는 아내라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엄마의 자리와 하나님을 믿고부터 관계되는 내 일상 담당이 나의 ‘옷’들이 되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나의 삶을 간섭하는 큰손이 직조한 옷을 입게 되었다는 말이다. 시간 베틀에 앉은 그 손길과 그 솜씨를 순간순간 감탄하며 경의롭게 체험하게 되었다.
겨울 동안 여러 번 장례식에 참석했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검정 색깔의 옷을 입고 참석한다. 어느덧 관속에 누워있는 망자에 대한 속마음 조의가 전달되고 그의 정갈한 수의에 한참 시선이 간다. 엄숙한 이런 분위기에 젖는 빈도가 잦으면서 떠남과 남겨짐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옷, 다 입어보지도 못한 채 남겨놓고 떠나면서 훌훌, 마지막 단 한 벌 옷,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을 남의 주검을 내가 목격함으로 나는 배우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옷이 나를 슬픔이나 실망에 오래 방치해 두지 않고 지켜준다는 신념은 귀한 내적체험이었다.
앓고 나서 밝은 계통의 옷 입기가 처음엔 좀 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봄이다. 밝은 색깔 옷을 입고 걸으러 나가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건강해진 듯한 경쾌함에 기분도 상승된다. 걸으면서 자주 만나는 길섶 꽃들도 온통 여러 색깔이다. 서로 어울려 곱게 핀다. 인간의 시선을 행복하게 해주는 꽃 떨기의 헌신은 이렇듯 대단하다. 생명색, 곱기만 하다.
걸으니 기분이 좋다. 어둡던 병상을 털고 일어나 입는 밝은 계통의 옷은 이렇듯 새로운 날개를 달아 주었다. 바로 자유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건강에의 꿈이었다. 전환이었다. 눈에 보이거나 마음에 보이거나 두려움을 박차고 회복으로 날아가는 듯싶었다. 오늘까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단순 내 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감사 또 감사했다. 어떤 이웃은 오늘 내가 살아온 햇수만큼 살고 싶어 했지만 떠났다. 또 내게는 당연하게 다가온 오늘이지만 이 오늘은 고통 가운데서도 살고 싶었던 누군가의 내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기에 감사가 물밀듯 느껴지는 것이다.
첫 번째 암 투병 후 나는 줄곧 덤으로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생명이 오늘 까지 연장됨에 따르는 시시각각의 감사에 어떤 의미가 있었다. 아들 둘이 아직 미혼일 그때는 엄마로서의 책임과 양육을 못하고 일찍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암으로 죽은 시어머니 부재의 집안에, 홀시아버지만 있는 집안에, 어느 딸을 시집보내올까 그런 두려움이었다. 그만큼 다 컸는데도 어미란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애착을 내보이기도 했다.
내가 떠나가도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 확실하다면 모든 것이 다 안전지대이다. 부활절이 다가온다. 이 순간에도 ‘보혜사 산바람은 나의 삶을 간섭하고 함께 한다’는 그 믿음 하나에는 변함이 없다.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그때 두 번째 암씨(氏)를 만났을 때는 더 열심히 환우들의 병상을 방문하며 지상에서의 시간이 모자라는 듯 동분서주 안타까워했다. ‘새롭게 하소서’ 방송까지 하면서 두려움을 없이 해주는 그 신기한 옷을 입혀주려고 이곳저곳 기웃대며 찾는 곳마다 응했다. 고 유장균시인의 그 우렁찬 ‘아멘’ 음성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옷을 사계절 입고 있으면 체온이 도망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토록 편하고 헐렁한 옷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맞는 그 옷은 ‘원 사이즈 핏즈 올'(One size fits all)이다. 그리스도란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