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경만 하고 있었나?     (5월 2020년 한국 그린에세이 신인상)

                                                                                                                             이희숙

 

 

전화벨이 울렸다. 그날 소파에 편안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일과의 긴장을 푸는 늦은 밤이었다. 한국에 사는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산불에 대피했는지 물었다.

"? 대피령? 어디에서 불이 났는데? 어떻게 확인하지? 우린 경찰이 다녀가지 않았는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옆집에 전화했더니 그 집은 온 식구가 나와서 지금 집밖에 물을 뿌리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며칠째 로스앤젤레스에는 고온 건조한 날씨에 산타애나 강풍까지 불었다. 전력공급을 강제로 단전하는 등 산불 예방을 했음에도 80마일로 부는 강풍에 가로수가 쓰러지면서 전선을 덮쳐 발화된 불이 빠른 바람을 타고 미친 듯 번지고 있다고 했다.

 

  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여기저기 산불 소식이 들려왔다. 인공위성에서 보면 로스앤젤레스 인근이 온통 빨간빛으로 버무려 보일 게다. 신문 1면 산불 사진이 마치 화보 같다. 화염에 싸인 주택, 한 생명을 구하고자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들어있다. 어찌하든 삶의 터전과 소중한 예술품을 지켜내고자 필사적인 그들이 숭고해 보이고, 또 맹렬한 불길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임을 새삼 느꼈다. 이 불길을 잡지 못한다면 게티 미술관, 시미벨리,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까지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우리 마을과는 거리가 멀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남의 일로 여기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오후부터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까지 산불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산불 때문에 길이 막혀 귀가하는 학부모가 늦게 왔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동네는 아니라고 안심했는데 밤늦게 받게 되는 안부 전화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일한 내 생각에 급기야 빨간 불이 켜졌다.

 

  서둘러 인터넷 실시간 뉴스를 켰다. 실시간 중계되는 화면에는 화마가 날름거리면서 깜깜한 밤을 붉게 물들이며 나무를 맹렬히 나무를 맹렬히 삼키고 있다. 빨간 불을 켠 소방차가 즐비하고 헬리콥터가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바로 우리 동네인 Fullerton Coyote Hill였다. 시끄러운 소리로 밤공기를 흔들었다. 길은 차단되고, 인근 집 주민들은 대피했다. 나도 딸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을 재촉했다. 남편에게 밖으로 나가 호스로 물을 뿌리라고 제안했다. 가까이 사는 지인에게 전화로 안부도 물었다.

 

머릿속이 질서 없이 바빠졌다. 집안을 둘러보며 귀중품을 찾아보았다. 당장 들고 나갈 것이 무엇일까?

'오늘 밤에 큰딸 집으로 대피해야 하나? 무엇을 챙겨 가야 하지?'

그랜드 피아노는 커서 어쩔 수가 없어. 그럼 우리 딸들이 어렸을 적부터 연주하며 간직한 첼로, 바이올린을?’

안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가 서랍을 뒤지고 이것저것 헤집어 봤다.

집 타이틀 문서, 자동차에 대한 것, 아니면 시민권 서류, 여권, 보험 증서들, 내 글이 담긴 컴퓨터? !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앨범들도 소중한 것인데

내 곁에서 함께 해 온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비운다고 욕심 없이 살았다고 했는데도 뭐가 이리 많은지.

 

위기의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 없는 물질인데, 순간 롯의 아내가 뇌리를 스친다. 소돔 성을 찾아온 천사들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이 임할 때 성을 빨리 떠날 것을 요구했다.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말라는 지시와 달리 롯의 아내는 뒤떨어져 있었고, 그녀는 소유물에 애착이 컸기 때문에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동안 불길이 치솟으며 돌진해 오는 끓는 물에 둘러싸여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나 또한 물질에 대한 욕심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다행히 불길이 수그러지고 대피령이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매캐하게 나무 탄 냄새가 진동하고 재도 흩날린다. 뿌연 하늘에 한 조각 떠 있는 구름 너머에 숨겨진 푸른 하늘이 가까이 와서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