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에서

                                                                                                              이희숙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렬한 태양이 올라오며 붉은 기운이 바다를 덮는 모습이라니. 비행기 창밖의 풍경에 나는 흠뻑 빠져들었다. 하늘 위에서 날짜 변경선을 지나며 이틀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일과 책임을 내려놓고 쉼표를 찍는 시간. 남태평양 위를 떠도는 하얀 구름 사이로 마음은 깃털이 되어 떠다녔다.

 

  11시간 후 피지 Fiji라는 작은 섬나라의 난디 Nadi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을 나온 안내원이 "Bula! 안녕하세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하며 조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겨울에 맞이하는 여름이 나를 흥분케 했다. 11월에 화씨 77도의 따뜻한 날씨라니 신기하기도 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332개의 섬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피지는 대부분이 화산섬이고 1/3은 무인도다. 우리는 첫날 그 섬 중 식인종 원주민이 지켜온 비세이세이 마을에서 전통 생활 모습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영국의 식민지로 사탕수수 재배에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총의 무력에 무릎을 꿇긴 했지만, 혀를 내밀며 가장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던 원주민의 모습이 건물에 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영연방 제국으로 영국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웨슬리 감리교회 앞에서 나는 영토 확장에서 빚어진 약자의 아팠던 과거를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튿날, 데라나우 선착장에서 흰 돛을 단 범선을 타고 티부아 아일랜드로 향했다. 이곳은 무인도다. 이제 우리가 발을 디디면 유인도가 될 터. 뱃머리에서 물살을 가르며 흰 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섬 주변의 바다 빛 색채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너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은 그리운 어머니 섬이 되어 나의 마음에 와닿았다. 파도가 밀려오며 어머니에 대한 옛 추억을 전해준다. 바람이 배의 돛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선원들이 기타 선율에 맞추어 그들의 민요를 목청껏 불렀다. 우수에 찬 멜로디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라일락 꽃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 대학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의 원곡이다. 자연스레 배에 탄 사람 모두가 어깨를 들썩이며 합창했다. 지휘자가 없이 연주되는 코러스가 작은 배 안에 울려 퍼졌다.

 

섬에 닿는다. 하늘을 향해 뻗은 야자수는 잎을 흔들며 방문객을 환영한다. 늘어진 잎사귀가 그늘을 만들어 우리를 품어주고, 고운 모래사장이 섬 주위를 감싸며 에메랄드빛 원시의 청결함을 드러낸다. 모래사장을 걷다가 출렁이는 파도의 부름에 유혹되어 바다 물속으로 들어간다. 바닷물이 따뜻하다. 온몸이 정화되며 마음 또한 청옥빛으로 녹아내린다.

 

  저만치 추억의 바다가 파도에 밀려온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바닷가에 살았다. 주말이 되면 도시락을 싸 들고 동생들과 해변으로 향했다. 바다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리고 뒹굴다가 바닷물 속에 첨벙 안겼다. 잔잔한 바다는 엄마 품이 되어 수영도 못하는 우리를 포옹해 주었다. 바닷물 위에 둥둥 떠서 손을 내젓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리며 스릴을 즐기기도 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해님이 서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내릴 무렵이 되어서야 급히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날은 등이 벌겋게 그을리고 물집이 생겨 누워 잠을 잘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물집이 터져 상처가 아물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바닷가를 찾아 푸른 물속에 몸을 담그곤 했다. 그 시절의 아이 웃음소리가 푸른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세나토아 하얀 꽃을 머리에 꽂고 남편의 귀에도 꽂아준다.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추억의 노래를 부르며 어릴 적 바닷가에서 즐기던 아이가 된다.

 

  65년이 흘러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타국 땅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얼마나 나를 혹사했던가. 이제부터라도 나를 사랑해주어야지.

석양이 불그스레 자취를 물들이며 남태평양 너머로 내려간다. 내일 떠오를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듯 손을 흔든다. "Mo De, 안녕!"

 

 

    11.0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