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가을을 떠나보내며      (퓨전수필 가을호 2019)

 

                                                                                                                       이희숙

 

 

  수확이 끝난 늦은 가을이다. 이른 아침 우리 내외는 오크 글랜 Oak Glen 사과 과수원 산기슭으로 오른다. 한철에는 자녀의 손을 잡고 사과를 따는 체험을 하기 위해 많은 가족이 찾아오는데 그들의 발길이 끊기고 주변이 한산하다. 사과 파이, 도넛, 사이다의 맛을 즐기던 분주한 때 지나갔나 보다. 바쁜 일상 탓으로 수확의 절정기를 놓친 양. 따다 남은 사과 알갱이가 군데군데 매달려 찬바람 속에 떨고 있는 듯 쓸쓸함을 더해준다. 서리 맞은 사과에 더 깊은 맛이 든다고 누가 말했던가.

 

 

  구름이 내려앉은 높은 산의 풍광은 고즈넉하다. 걷히는 구름 속에 고운 색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날씨 탓에 늦었지만, 여전히 단풍빛을 유지하고 있어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참나무(Oak) 단풍잎은 노란빛으로, 단풍나무(Maple)는 붉은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숨겨진 과수원을 둘러싼 진풍경은 가을을 숨쉬기에 충분하다. 늦가을에 걸맞은 여유다. 하이킹 코스로 접어든다. 낙엽이 쌓인 길은 푹신한 감촉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구름 위를 걸어가듯 가볍게 발을 내딛다가 무엇인가 발에 부딪힌다. 나무 아래 덥수룩한 밤송이를 발견하고 반가워한다. 가시 껍질 속에 파묻힌 밤 알갱이를 신기롭게 바라본다. 눈길이 닿는 곳에 밤 형제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두껍고 딱딱한 껍질 안에 그 부드러운 밤의 맛을 품고 있다니 놀랍다.

 

  다음 주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다. 가을비가 오기 전, 보내야 하는 가을에 흠뻑 젖어 걷는다. 과수원 길에 꽉 찬 고운 색채는 떠나는 가을의 쓸쓸한 뒷모습을 대신해 준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머리카락 뒤로 내 그림자가 짧아진다. 스웨터로 시린 어깨를 가려본다. 겨울비에 후두둑 떨어질 나뭇잎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두 손으로 받아보며 세상을 향한 무게를 가슴으로 느껴보리라.

바람결에 나부시 손짓하는 어머니, 동생,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목소리가 들려 오는 듯. 떠나는 가을 자락을 잡으려 햇볕 따스했던 가을날을 회상한다.

 

 

<햇살 좋은 가을날>

 

햇살의 손길에 영근 사과들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 주렁주렁 매달려 웃고 있다

주황빛으로 덧칠한 늙은 호박은/그윽한 국화 향기에/ 온 얼굴에 굵직한 웃음 주름을 접는다

아기는 코스모스 줄기를/ 잡을락 말락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데 /

코스모스는 아기의 걸음마가 걱정되어 / 살랑살랑 내려다본다

가을볕에 빨갛게 익은 잠자리들이/ 여유로운 날갯짓으로 하늘을 난다/

가을을 걷는 아이가 하늘을 쳐다본다/ 이젠 하늘만큼 키를 키우고 싶어서인가 봐

 

 

  가는 계절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 떠나는 가을의 뒷모습을 보며 찬란했던 젊은 날을 돌이켜 본다. 잠자리채 흔들며 따라가던 아이의 소망이 있었다. 흔들리는 코스모스 연한 잎을 보며 사색에 빠졌던 여고 시절을 지났다. 붉은 사과처럼 영글어 일의 성취를 이루고 싶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호박밭은 텅 비어 있다. 여기저기 남겨진 호박이 뒹군다. 햇볕에 그을린 누런 모습이 할머니의 미소를 닮았다. 누렇게 성숙한 모습이 들판의 허전함을 달래 준다. 주름진 손으로 부지런히 추수한 땀이 묻어 있다. 이젠 색이 바랜 늙은 호박이지만 그 속에 그윽한 인생의 맛이 녹아있다.

 

  여름철 군무를 이루던 해바라기의 노란 물결이 시들어 사라졌다. 키가 큰 해바라기 한 줄기가 오롯이 태양을 향해 들녘을 지킬 뿐이다. 대견하기까지 하다. 해를 바라던 열정이 검게 타 갈색으로 변했다 할지라도 씨앗을 품고 있는 나를 본다. 늦가을의 정취는 노년의 완숙미가 아닐까. 변하는 계절 속에서 창조주의 섭리를 읽으며 의미를 고스란히 전해 받는다. 내가 인생의 늦가을에 있기 때문이다.

 

  모두 다 돌아가는 계절. 스산한 바람에 돌려줄 것은 돌려주고, 보낼 것은 홀가분히 떠나보내리라. 용서와 감사로 서운해하지 말자. 잎 벗은 나무는 가벼울 테고 빈 숲의 흙은 숨을 고르리니. 내 빈 삶에 흙이 고여 새싹이 돋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