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청춘으로 살게 하는 것들             (11. 19. 2021 중앙일보 이아침에)

 

                                                                                                                                                  이희숙

 

 

밤새 바람이 불었다. 곱게 물들었던 감잎이 우수수 떨어져 늦가을의 쓸쓸함을 더해준다. 토요일 아침, 사람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일찍 미용사와 예약했다. 너무 이른 탓인지 미용실 안은 한산했다.

 

머리가 하얀 백인 할머니가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많지만 온화한 미소가 포근한 인상을 풍겼다.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이가 86세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다. 작은 체구이지만 꼿꼿한 자세로 부지런하게 손님의 머리를 매만진다. 혼자 살면서 집에 하숙을 치고 남동생도 돌보며 즐겁게 산다고 한다.

 

은빛 머리를 손질받는 손님이 있었는데 그녀는 98세로서 운전면허를 갱신했단다. 내일모레가 백 살인데 아직도 운전을 한다니 그녀의 활기찬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에너지가 내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놀란 마음이 채 가라앉기 전에 옆 칸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음식을 싸 들고 출근한다. 같이 일하는 동료와 나누기 위해 간식을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몇 분 후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신다. 가발을 벗으며 머리를 산뜻하게 단장했다. 10대 소녀들을 보는 듯하다.

 

미용실은 오랜 세월 동안 노인들의 일터가 되어 이른 시간부터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 찼다. 그들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렌트비를 올리지 말라고 건물 주인에게 당부까지 했단다. 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신선한 세상을 보았다. 이미 은퇴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며 다른 사람까지 즐겁게 보살피는 태도가 여유롭다. 그들에겐 지금이 청춘인 것을. 나도 저 나이에 일할 수 있을까? 은퇴를 고민했던 내가 부끄럽다. 나는 어떻게 노년을 보내야 하는가? 대답이 보이는 듯하다.

 

  머리 손질을 마친 후 마음은 파티에라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노후를 위한 계획과 해결책' 세미나에 참석했다. 소설 시큐리티 연금만으로 부족한 은퇴 후 생활비를 보충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후 계획은 아련히 먼 미래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제 발 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한 숫자와의 씨름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며 가슴에 스치는 강한 메시지가 있. '은퇴는 직장을 떠나는 것이지 일을 떠나는 게 아니다.'

 

  노후를 위해 물질만이 아닌 정신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은퇴 후 노인으로 사는 만만치 않게 긴 세월을 헤아려본다. 내 세월의 위치를 감지하고 받아들여 '잘 늙어가기' 계획을 세워야 함을. 여전히 청춘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다.'라고 한다. 세월은 주름살을 더하지만, 마음을 시들게 하지 못한다. 남은 생을 완성하는 설계와 실천 항목을 정해보련다. 내 여건에 맞추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먼저 마음을 비워 내려놓는 것이다. 그동안 삶을 위해 움켜쥐었던 많은 줄을 풀어놓자. 나를 지탱케 했던 일에 대한 성취욕과 위를 향한 목표, 주위 사람을 위한 책임감에 대한 방향을 바꾸어보자. 살면서 입은 은혜의 빚을 갚기 위해 이젠 꼭 쥐었던 주먹을 펴야겠다. 나누고 봉사하며 주위를 행복하도록 애쓸 때이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닫혔던 시니어 센터가 문을 열면서 배움에 열정을 품은 노인들이 라인댄스, 요가, 영어회화, 스마트폰 교실의 수강신청에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지식에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어린이의 시선으로 다가가자.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새롭고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여전히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 예리한 비판력은 없을지라도 그동안 얻은 경험과 지혜를 통해 전체를 둘러볼 수 있지 않을까. 젊은이의 미흡한 점을 슬그머니 채우며 너그러이 수용하여 같이 가고자 한다.

 

  45년 동안 알곡을 키우기 위해 서 있던 벌판에서 소슬바람처럼 부드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뜨거운 태양이 서쪽으로 스러지고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에서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려 한다. 빛바랜 모자를 여미고 수고의 땀을 훔치며 겸허하게.

 

  남은 사명을 지키기 위한 늦가을의 기도는 날 청춘으로 살게 할 것이다.

 

 

 

 

 

 

 

9. 21.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