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는 떠나지 마라

 

                                                                                             신순희

 

비가 오고 있다. 회색 하늘에 푸른 잔디의 시애틀, 아직은 가을이다. 앞집 할머니가 떠났다. 멀리.

우리 집에서 빤히 보이는 바로 건너편 할머니 . 주택단지가 조성된 처음부터 동네에서 살았다는 할머니는 웃으면서 가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평생 남편과 집에서 살았다. 나는 남편도 하나 집도 하나 기르던 개도 하나였다.” 

미국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옅은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 짧은 커트 머리를 할머니 이름은 제니퍼지만 모두 젠이라고 불렀다. 차마 그렇게 못하고 미세스 마샬이라 불렀다.

할머니는 결국 이사를 택했다. 나한테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말했는데….. 식구에서 하나 남겨진 할머니. 전에는 할아버지에게 잔소리하는 힘으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면서도 이따금 소통이 되는 답답함에 소리를 질러댔다.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을 앓았다. 지난해 여름 한나절 햇볕을 쬐려고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넓은 모자를 쓰고 팔을 늘어트리고 앉아있다가도 나를 보면 힘겹게 손을 들어 아는 체했다. 보일락말락 미소도 지었다. 뜨거운 해를 받아 볼이 발개지면 아기 같던 마샬씨는 그런 천진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라 군인묘지에 묻혔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서 추모식이 있다고 알려왔다. 할머니 집에 무얼 가지고 가야 할지 궁리 끝에 작은 과자 상자를 들고 갔다. 조용히 담소하는 문상객들 손에는 포도주잔이 들려 있었다. 슬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촐한 파티 같았다. 할머니의 속마음은 없으나 겉보기에는 여전히 활달했다. 검은 옷으로 성장한 친지들은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기념사진 찍자며 베란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음도 문상 같지 않았다. 노란 국화를 들고 가지 않은 다행이었다.

할머니는 없이 정원 손질을 했다. 일할 때는 앞에 흘러간 팝송을 커다랗게 틀어놓았다. 내가 여학생 어설픈 영어로 따라부르던 노래다. 적어도 시절 노래로 할머니와 나는 통한 셈이다. 가끔 할머니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모 자식 관계가 독립적이면서도 끈끈한 사랑이 넘쳤다.

할아버지가 떠난 , 할머니의 꼬장꼬장하던 목소리도 꼿꼿하던 허리도 변해갔다. 화통하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허리가 구부정하니 일어서는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가 감기몸살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그만 케이크 상자를 들고 할머니를 방문했다. 침침한 커다란 침대 한쪽에 동그마니 누워있다. 힘없이 내미는 손을 잡아보니 투박하다. 그래도 할머니의 손에는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지난여름, 할머니는 오래 집을 비우더니, 돌아온 열흘이 되어 할머니 앞에 부동산 매물 팻말이 붙었다. 죽을 때까지 집에서 살겠다던 할머니가 집을 팔다니, 뜻밖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놀랬지?” 마음을 읽은 할머니는 말했다.

몸이 부쩍 쇠약해진 할머니는 혼자 사는 두려워졌다. 스포캔에 사는 둘째 아들 곁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 살만한 집을 벌써 두었다. 매매 철이 지났지만 집을 내놓기로 했다. 그림 같은 정원에 반해서인지, 일주일 만에 매매가 성사되었다. 할머니는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할머니는 이사했다. 우리 집을 지켜주던 할머니인데. 봄부터 가을까지 할머니는 차고 문을 활짝 열어두고 바깥일을 했다. 건너편 우리 집을 향해 의자를 내놓고 앉아 선글라스를 쓰고 책을 읽었다. 볕이 조금만 좋아도 젊은이같이 짧은 반바지에 가슴이 시원하게 드러난 셔츠를 입고 일광욕을 즐겼다. 모습을 더는 없게 되었다.

언젠가 우리 강아지가 집을 뛰쳐나간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쪼르르 전화했다.
너희 강아지 나왔다. 빨리 데려가라.”
옆집 아이들이 우리 잔디에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 신경 쓰게 해도 참고 있던 나와는 달리, 집에다 대고 대신 따져주던 할머니였다.
너희들 잔디에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받았니? 그렇게 함부로 남의 잔디에 들어가면 된다.”

우리 엄마같이 경우가 밝고 인정 많은 미세스 마샬이 우리 동네를 떠난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흥분한 탓인지 할머니의 입술이 떨렸다.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도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할머니의 얼굴이 눈물을 참느라 심각해졌다. “ 블레스 말을 시키면 울어버릴 같은 할머니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오래된 친구들은 떠나간다. 갑자기 나도 떠나고 싶어진다. 새로 이사 집마다 꽁꽁 문을 닫아걸고 산다. 얼굴을 마주칠 없다. 할머니가 없는 동네는 무정하다.

이삿짐 차가 앞서고 잠시 할머니 아들의 트럭이 출발하고 할머니의 은빛 승용차가 떠난다. 동네 꼬마 둘이 우비를 입고 할머니에게 바이바이손을 흔든다. 나는 할머니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 거실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정말이지 오는 날에는 떠나지 말아야 한다. 빗물에 창유리가 흐려진다.

할머니, 앞에 내내 나부끼는 성조기는 두고 떠났다.

 

[201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