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만이 자신의 가치를 만든다

 

이성숙

 

 사람에게 과거란,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어 약이 되는 것인가 독이 되는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과거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앞만 보고 가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방편대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자주 들먹이는 사람을 보면 왠지 초라하고 쓸쓸해 보인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시키는 삶도 부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간혹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잘 나가던 지난 한 때’를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과거지향형 사람들이다. 현재가 볼품없다 여길수록 과거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안타깝다. 인생은 그 속성이 앞으로만 가도록 되어 있다. 돌아볼 수는 있어도 돌아갈 수는 없다. 설령 윤회를 거듭한다 해도 그것은 복습이 아니다. 여전히 앞으로 가는 것이다. 과거를 되새길 게 아니라 진정을 담아 현재를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다 보면 미래는 덤으로 올 것이다.

나는 남-꽤 가까운 사이라 해도-의 과거사에 별 관심이 없다. 과거는 현재를 변명할 도구가 되지 못한다.  묵묵히 현재를 밀고 가는 것만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국제시장’의 말미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평생을 가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한 가장이 백발이 되어서 홀로 아버지 영정이 차려 진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고백한다.

   “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한 거 맞죠. 나 많이 힘들었습니다….” 

 극장 안에서는  신음 같은 탄성이 터졌다. 주인공 덕수는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 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반항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가치는 그 철저한 수용과 현재성에 있다. 성공한 자식들 앞에서 아버지의 과거를 들려주는 대신 돌아가신 부친의 영정 앞에서 고백하는 장면을 취함으로써 영화는  카타르시스에 도달한다. 관객은 덕수의 ‘현재’에 몰입했고 감동받은 것이다.

 

 고난과 역경은 카인의 후예들이 넘어야 할 필연의 산일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른 족속과 구별되는 인생의 위대함 또한 거기에 있다. 묵묵히 견뎌 낸 생은 찬란하고 눈물겹다. 지난날에 잘 살았던 것이 현재에 하나도 소용되지 않는다면 인생 어느 지점에서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본인의 실수였을 수도 있고 때를 잘못 만난 까닭일 수도 있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현재로써 설명된다. 현재가 진지하다면 잃어버린 과거는 다른 모습으로 복원될 수도 있고 미래 또한 당연한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물론 안다. 인생이 언제나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의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중도에 살기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명나게 살아보는 수, 그 수밖에 없다. 현재만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