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빠진 날

                                                                                                                                              이희숙

 

  진달래가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메말랐던 산천초목이 부활하는 계절이다. 내 귀가 빠진 날은 봄 한가운데 있다. 자연이 새롭게 피어나듯 작은 생명이 태어났다. 세상에 나와 한 달 후 엄마의 품에 안겨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내 신앙이 침체할 때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생일은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는 최고 기쁜 날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일파티를 연다. 케이크의 촛불은 그의 나이와 같은 숫자다. 많을수록 빛은 더 밝아지고 힘차게 불 수 있다. 생일을 기다리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선물을 받아 즐거워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이어서일까? 더불어 엄마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일을 왜 귀빠진 날이라고 부를까?

  아기는 열 달 동안 엄마의 배 속에서 자란 후 진통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 애는 자신이 발육했던 포근한 물속을 떠나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기의 귀가 빠져나올 때가 가장 힘든 고비라고 한다. 귀가 나오면 90% 무사히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어려움을 넘기고 아기를 낳게 됐다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 산통을 겪어야만 한 생명이 세상에 내어 보내지는 의미를 지닌다.

  포유류 중 인간만큼 산통을 겪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고통을 겪으며 날 세상에 보내 주신 엄마에게 감사드린다. 생일이 나의 기쁜 날이 아니라 엄마가 나를 낳느라 고생한 날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딸을 출산하여 엄마가 된 후에서야 말이다. 산후에 엄마가 먹었던 미역국을 기억하며 내 생일날에 미역국을 먹는 이유이다. 출산의 고통을 되새기면서 엄마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다.

  나는 첫 생명의 존재인 무녀리로 몸도 약하고 부실한 탓에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더불어 긍정적 자신감을 얻었다. 오 남매 중 맏이라는 책임감을 생활에서 익히며 마음은 굵어졌다. 결혼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았다. 나이는 삶 중심에서 생명을 잉태하여 손주 세대로 이어져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세상에 태어나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는 두 딸을 생산한 것이 아닐까. ‘참 잘했다라며 나를 다독이고 싶은 날이다. 공기를 가르는 울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연결된 탯줄이 잘리고 한 생명이 독립하던 날의 벅찬 기쁨을 잊을 수 없다.

  딸이 "엄마!"라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 걸까?'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숙한 채로 부딪히며 실수를 거듭하고, 연마하는 노력 속에서 나이는 영글어 갔다. 가족의 섬김과 이해와 사랑으로 성숙해졌다. 그 딸이 성장하여 또 엄마가 되었다.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 진통을 시작할 때 나는 안쓰러워 곁에서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겪었던 아픔이 되살아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나 보다. 이렇듯 힘든 산통의 과정을 거쳐 엄마로 거듭나는가 보다. 자신의 분신인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된다.

  해마다 새 달력을 받으면 가족의 생일을 빨간색으로 기록한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어릴 적엔 "내가 나이가 더 많아"라며 손가락을 펴 자랑했다. 그땐 나이가 많으면 세상을 이긴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언니'란 단어가 자랑스럽고 부러웠지만, 나이의 숫자 하나가 늘어나면 나이 듦의 무게가 더해졌다. 마흔 후반을 지나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며 마음가짐을 바꾸기로 했다. ‘나이는 삶의 선물이다.’라고. 행복이라는 선물의 보자기 속에 꼬옥 담겨 있다.

  이제 다리의 힘이 빠지고 기억력이 쇠해지는 노년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말자. 생일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날이지 않은가. 삶의 우선순위를 인식하여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막연한 아쉬움과 미련 대신 다양한 세상살이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여유로 남아 있는 새로운 인생을 디자인해 보자. 겉보다는 내면을, 결과물보다는 관계 중심으로 전환해 보련다. 연륜 속 깊어가는 시간의 선물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맛있는 인생을 차려 놓은 생일 식탁을 준비하련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6.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