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란

                                                     신순희

  

발등을 찍혔다. 요즘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제는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면서 싱크대에 걸쳐놓은 유리그릇을 깼다. 왕창 박살 났다. 막을 수 있었는데. 아침부터 찌뿌둥한 날씨로 행동이 느려지는데 방안을 정리하다 의자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 손과 발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다. 나이 든다고 미적 감각이 둔한 건 아닌데, 젊었다면 호들갑 떨었을 것을 흉터 좀 난들 어쩌랴 체념하고 만다.

날이 꾸물대니 마음도 처진다. 누구 하나 속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없다. 다른 이들은 함께 골프를 친다 라인댄스를 배운다 헬스클럽에 간다는데, 운동에도 취미가 없고 몰려 다니는 것도 싫고 누구나 말하는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을 즐기지도 못한다. 위장이 볶아 채서.

비는 내리고. 보이지 않게 내리는 이 비는 지금이 어느 땐데 봄비 흉내를 내는 것인지. 동부는 찜통 여름이라는데 시애틀의 여름은 언제 오려나. 기후가 바뀐 건지 여름에는 오지 않던 비가 끈질기게 온다. 그통에 텃밭에 상추가 성급하게 씨를 맺으려 꽃을 피운다. 체리나무에 달린 어린 열매는 붙어있는 것보다 떨어진 게 더 많다. 새들은 떨어진 열매는 먹지 않는다. 떼로 다니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들은 나무에 매달린 싱싱한 체리만 건드린다. 얼마나 발달한 미각인가. 맛있는 건 저들이 먼저 먹는다.

들토끼도 그렇다. 잔디밭에 넋 놓고 퍼진 토끼풀이 지천인데 거기엔 눈길도 안 준다. 텃밭에 어린 싹을 싹둑 잘라먹고 호시탐탐, 애써 가꾸는 사람이 먹을 풀에만 관심을 둔다. 남의 것이 좋아 보이긴 하다. 그렇다고 씨 뿌려 겨우 나온 손톱만 한 깻잎 싹을 따먹는 건 너무했다. 어두워질 때까지 입을 오물거리며 먹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 자리에 까만 똥을 무더기로 싸놓고 그대로 깜빡 잔다. 느긋한 들토기는 시애틀과 어울린다.

창밖에 비는 내리고. 새들도 들토끼도 보이지 않는다. 초록만 무성하다. 빗속에 나무들 키가 쑥쑥 올라간다. 저 나무 잘라준 게 언젠데 또 저렇게 자랐나. 나무 잘라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면 안 될까. 자연 그대로 나무 키가 크든지 들토끼가 무얼 먹든지 새가 열매를 축내든지 말든지. 잡초가 무성하더라도 손대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언젠가 화초 옆에 잡초 하나를 제때 뽑지 못해 맘 놓고 자라니 키가 일 미터는 되는 게 내가 봐도 영 풀 같지 않았다. 앞집 할머니가 내가 모르는 줄 아는지 그거 풀이라고 말해 주어 나를 웃겼다. 자연스러움이 지나치면 질서가 문란해진다.

싱숭생숭해진 마음에 쓸데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니 어느새 발등의 통증은 가라앉았다. 실내가 조금 밝아졌다. 새삼스레 거실 구석구석에 눈길이 간다. 아니 이게 무어야. 언제 이런 꽃이 피었어? 감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군자란이다. 그동안 진초록 긴 이파리만 보여주었는데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팔 년 만이다.

갑자기 상쾌하게 내 안의 무언가 깨어난다.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다. 한 송이 꽃이 나를 이다지도 들뜨게 하다니. 너 참 잘 피었다. 매일 거처하고 있는 내 집안 한 귀퉁이 화분에서 꽃대가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쑥 올라온 하나의 굵은 꽃대에 자그마치 열 송이가 주홍 나리꽃처럼 달려있다. 사방에 나팔을 불 모양이다. 군자란이 꽃 피우는 동안 난 무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하였는지, 참 무심한 여자여. 곁눈질 한번 못 주고 살았구나.

 이 기쁨 누구에게 전할까. 이 화분의 역사를 아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군자란이 뭐지?’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니 짐작이 가는지 ‘아 그거’ 한다. 한 옥타브 올라간 내 목소리에 남편도 전염되었다. 덩달아 목소리가 밝아지고 힘차다. 기쁨은 나누는 거라더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서울에 사는 언니가 몇 년 전 사진 한 장을 부쳤다. 십 년 만에 핀 선인장꽃이라며 신통해했다. 그때 언니도 이렇듯 즐거웠겠지. 언니에게 전화했다. 군자란은 잎이 열 장 이상 나야 꽃이 핀다, 한번 피면 해마다 꽃이 필 것이다. 매년 핀다고? 점점 희망이 솟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니 이 군자란은 꽃 피울 줄 모르나보다 했는데. 팔 년 만에 희소식을 가져다준 모퉁이의 화분 하나.

빗줄기가 굵어졌다. 후드둑 소리가 커졌다. 비야 실컷 오거라. 네 맘대로 해라. 슬며시 자신감이 생긴다. 오래된 화분이 꽃을 피우는데 나라고 꽃 피우지 말라는 법이 있나. 내 안에도 화분 하나 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는 것. 가슴을 펴라.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이다.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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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신순희

  

발등을 찍혔다요즘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어제는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면서 싱크대에 걸쳐놓은 유리그릇을 깼다왕창 박살 났다막을 수 있었는데….아침부터 찌뿌둥한 날씨로 행동이 느려지는데 방안을 정리하다 의자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손과 발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다나이 든다고 미적 감각이 둔한 건 아닌데젊었다면 호들갑 떨었을 것을 흉터 좀 난들 어쩌랴 체념하고 만다.

날이 꾸물대니 마음이 처진다타국에서 누구 하나 속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다다른 이들은 함께 골프를 친다 라인댄스를 배운다 헬스클럽에 간다는데운동에는 취미가 없고 몰려 다니는 것도 싫고, 위장때문에 누구나 말하는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을 즐기지도 못한다.

창밖에 비가 내린다보이지 않게 내리는 이 비는 지금이 어느 땐데 봄비 흉내를 내는 것인지동부는 찜통 여름이라는데 시애틀의 여름은 언제 오려나기후가 바뀐 건지 여름에는 오지 않던 비가 끈질기게 온다그통에 텃밭에 상추가 성급하게 씨를 맺으려 꽃을 피운다체리나무에 달린 어린 열매는 붙어있는 것보다 떨어진 게 더 많다새들은 떨어진 열매는 먹지 않는다떼로 다니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들은 나무에 매달린 싱싱한 체리만 건드린다얼마나 발달한 미각인가맛있는 건 저들이 먼저 먹는다.

들토끼도 그렇다잔디밭에 넋 놓고 퍼진 토끼풀이 지천인데 거기엔 눈길도 안 준다텃밭에 어린 싹을 싹둑 잘라먹고 호시탐탐애써 가꾸는 사람이 먹을 풀에만 관심을 둔다남의 것이 좋아 보이긴 하다그렇다고 씨 뿌려 겨우 나온 엄지손톱만 한 깻잎 싹을 따먹는 건 너무했다어두워질 때까지 입을 오물거리며 먹기만 하는 게 아니다그 자리에 까만 똥을 무더기로 싸놓고 그대로 깜빡 잔다느긋한 들토기는 시애틀과 어울린다. 

초록만 무성하다새들도 들토끼도 보이지 않는다빗속에 나무들 키가 쑥쑥 올라간다저 나무 잘라준 게 언젠데 또 저렇게 자랐나, 나무 잘라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면 안 될까자연 그대로 나무 키가 크든지 들토끼가 무얼 먹든지 새가 열매를 축내든지 말든지잡초가 무성하더라도 손대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언젠가 화초 옆에 잡초 하나를 제때 뽑지 못해 맘 놓고 자라니 키가 일 미터는 되는 게 내가 봐도 영 풀 같지 않았다앞집 할머니가 내가 모르는 줄 아는지 그거 풀이라고 말해 주어 나를 웃겼다자연스러움이 지나치면 질서가 문란해진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쓸데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니 어느새 발등의 통증은 가라앉았다실내가 조금 밝아졌다새삼스레 거실 구석구석에 눈길이 간다아니 이게 무어야언제 이런 꽃이 피었어감탄이 절로 튀어나온다군자란이다그동안 진초록 긴 이파리만 보여주었는데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팔 년 만이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다갑자기 상쾌하게 내 안의 무언가 깨어난다한 송이 꽃이 나를 이다지도 들뜨게 하다니너 참 잘 피었다매일 거처하고 있는 내 집안 한 귀퉁이 화분에서 꽃대가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쑥 올라온 하나의 굵은 꽃대에 자그마치 열 송이가 주홍 나리꽃처럼 달려있다나 여기 있다고 사방에 나팔을 불 모양이다군자란이 꽃 피우는 동안 난 무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하였는지참 무심한 여자여곁눈질 한번 못 주고 살았구나.  

이 기쁨 누구에게 전할까화분의 역사를 아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군자란이 뭐지?”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니 짐작이 가는지 아 그거한다한 옥타브 올라간 내 목소리에 남편도 전염되었다덩달아 목소리가 밝아지고 힘차다기쁨은 나누는 거라더니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그때 언니도 이렇듯 즐거웠겠지. 서울에 사는 언니가 몇 년 전 사진 한 장을 부쳤다십 년 만에 핀 선인장꽃이라며 신통해했다언니에게 전화했다군자란은 잎이 열 장 이상 나야 꽃이 핀다한번 피면 해마다 꽃이 필 것이다매년 핀다고점점 희망이 솟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니 이 군자란은 꽃 피울 줄 모르나보다 했는데팔 년 만에 희소식을 가져다준 모퉁이의 화분 하나!

슬며시 자신감이 생긴다. 빗줄기가 굵어졌다후드둑 소리가 커졌다비야 실컷 오거라네 맘대로 해라오래된 화분이 꽃을 피우는데 나라고 꽃 피우지 말라는 법이 있나내 안에도 화분 하나 있다때가 되면 이루어지는 것가슴을 펴라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다.

 

[2023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