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강물은 흐르고 / 신 혜원
소풍을 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파트 문을 나섰다. 가을 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창공에 시선을 주며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바람이 나를 쓸어안는 듯 반겨주었다. 35년 전 낯선 기대를 안고 동생들과 함께 이민을 향해 가던 발걸음에 어찌 비하랴. 지난 시월 육일에 남편과 함께 모국방문을 나선 것이다. 꿈같은 여정이기에 가슴은 뛰고 벅차기만 했다.
주말을 끼고 총 보름간의 휴가를 내었다. 초청자의 특별 배려로 우리가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산본 이었다. 보내준 차편에 몸을 싣고 내다본 고국의 거리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찾아가기 힘든 길이며 도시였다. 비가 내렸는지 촉촉한 차창 밖은 벌써 하루를 잃어버린 것 같은 저녁시간이었다. 그 곳에 도착하기 전 의정부에 사시는 둘째 오빠 댁에 들어가 짐을 풀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산본에 있는 선한 목자 교회에서 사경회를 마친 후 우리는 남편의 고향을 찾아갔다. 풀냄새가 확 들어오는 경상도 의성 단촌의 향취는 여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 어두워지고 오랜만이어서 남편은 수양 누님 댁도 잘 찾지 못했다. 차편을 제공하며 함께한 친구 덕분에 다시 제천으로 향했다. 시부모님 대신 시누이님 내외가 반겨주어서 숙식을 제공받고 포근함을 누렸다. 시누이님은 내 남편을 유심히 보더니 ‘어쩜 이렇게 아버지와 꼭 닮았니’ 하셨다.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부모님을 뵈듯 하는 것은 그리움이 앞서서일 것이다. 제천에 볼 것이 많으니 구경하고 가라 하시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옮겨야했다.
다시 작은 시누이가 사는 서울로 올라온 주일, 남편의 친구의 매형님 비보를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여수로 가려던 계획을 미루고 성모병원에 들른 후 용인으로 향했다. 한국 방문 중 이곳 에 갈 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순응해야하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 곳에서 함 동수의 시 ‘지는 꽃’ 이 눈에 확 들어왔다. - 꽃이 피는가 돌담 곁에 장미 한 송이 탐스럽게 피는가 수고했다 꽃 한 송이 피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얼마나 많은 바람과 햇빛이 쓰다듬었느냐 찬란한 꽃 한 송이 그것만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뜻 충분했다 국화 향 퍼지는 저물녘 꽃 한 송이 허물어지는가 수고했다 수고했다 그간 수고 했다 꽃 지고 나니 향기 자욱하구나- 용인 평온의 숲엔 꽃처럼 살던 어느 누구라도 언젠가 이렇게 누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다음날은 아버지를 대신할 만큼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셨던 서울 큰 오빠 댁으로 향했다. 큰 올케는 나의 소녀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상형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있는 아름다운 분이다. 오빠는 은퇴하시고 노인담당 사역으로 뒷전에서 교회를 돕고 계셨다. 80을 바라보니 전처럼 활달하게 일하시지는 않지만 건재하신 것으로도 충분히 든든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틀을 묵으며 철없이 마음껏 떠드는 나의 얘기를 다 들어 주셨다. 올케언니의 “고모 이민 잘 갔어, 근데 어머니와 똑 같아” 라는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친정엄마의 모습인 것을 어찌 감추랴. 그래도 함께 식사하고 얘기 나누며 편히 쉬고 사랑을 받으니 그동안 쌓였던 이민의 짐을 덜어놓은 듯 가볍고 마음이 훈훈해졌다.
다음날 아침 새사람 수련원이 있는 안성으로 향했다. 수목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숲, 그곳에 부모님의 납골이 안치되어 있다. 들어가자 우리 8남매 이름과 부모님 사진을 보자 가슴이 울컥해지며 눈물이 나왔다. 잠시 묵념을 하며 ‘저를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동생들은 제가 보살필게요. 염려 마세요.’라고 아뢰었다. 눈을 뜨고 앞에 있는 사진을 보는데 둘째아들 어릴 때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언제 오빠에게 우리 아들의 사진을 보냈을까 깜작 놀라서 물어보니 큰 오빠 어릴 때 사진이라고 한다. 돌 때 찍은 사진이 어쩌면 그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외탁의 혈통도 이렇게 이어짐이 참으로 신기했다.
둘째 주 수요일에는 여수행 비행기를 타고 무릎을 수술한 둘째 시 아주버님을 뵈러 애향병원으로 향했다. 거의 이십 년 만에 뵙는 분이어서 반가와 하셨다. 아주버님의 노랗게 야윈 모습은 시어머님과 많이 닮아보였다. 물리치료를 하시는 동안 둘째 형님은 우리를 손 양원 목사님 기념관으로 안내하셨다. 말로만 듣던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 삼으신 사랑의 원자탄, 그 분의 기념관에서 ‘아홉 가지 감사문‘을 가슴 절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실천자이며 신앙인임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이 찡해왔다.
다시 오산에 있는 셋째 오빠를 만났다. 요양원이었지만 외로운 오빠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싶었다. 식사를 한 후 예쁜 단풍이 있는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건조한 엘에이의 팜추리 거리와는 너무도 비교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작고 실한 단풍을 따서 연민을 담아 수첩에 끼워놓았다. 위로가 필요한 오빠가 사는 그곳이 공기도 좋고 운치가 있어 참 다행임을 확인시켜드렸다. 그리고 막내 동생이 사는 대전으로 향했다. “누나, 애들 다 장가갔으니 이제 한국에 나와 살면 안 돼?” “내가 언제까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은 네 부인이야. 제발 오순도순 잘 살아라” 막내 동생은 아직도 엄마처럼 따뜻하게 마냥 품어주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철부지로 보였다. 동생에 대한 사랑과 염려는 늘 내게 숙제처럼 남겨진다. 정을 더 나누지 못하고 아쉽지만 발을 떼어야했다.
같은 대전에 사는 막내 시동생 집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고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바삐 다니느라 먼저 뵙지 못한 큰 아주버님을 뒤늦게 만났다. 오자마자 찾아뵙지 못한 점이 미안했는데 함께 머물지 못한 아쉬움과 섭섭함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너무 늦어 시부모님 산소에 가서 벌초 하지 못한 것과 기일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되었다. 못내 헤어짐이 아쉬웠는지 “다시 한국에 와서 살 생각은 없니? 그래도 이다음에 내 나라 땅에 묻혀야 하지 않느냐?” 하시는 말씀에 밤새 혼란스러웠지만 한번쯤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 가슴에 담아두었다.
이튿날 아침 출국하기위해 서둘러 공황으로 갔다. LA행 티켓 팅 줄에 섰다가 가장 중요한 여권과 티켓을 넣어둔 컴퓨터 가방을 싣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다급해진 우리는 아찔했다. 촉각을 새워 손아래 시누에게 찾아오도록 부탁을 해놓고, 비행기를 놓치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계획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며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 접수 1분 마감도 지난 후에야 달려가서 극적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안도의 숨을 돌리고 나니 막내 남동생이 떠올랐다. 급히 전화를 했다. 어린 제자와 사는 남동생의 결혼생활이 늘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의외의 동생의 말, “누나, 와줘서 참 고마워. 잠간의 만남이었지만 우리가 잘 풀려가. 난 누나가 좋아.”
바로 이거였다. 힘들고 외로울 때 너와 내가 받아야 할 치료는 바로 만남과 소통이었다. 특히 멀리 모국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의 짧은 만남과 대화는 아쉽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며 행복이다. 그리고 뗄 수 없는 끈끈한 사랑으로 이어져 보이지 않게 치유의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