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 총 45명의 역대 대통령의 업적, 리더십, 소통기술, 국내문제, 도덕성, 행정관리 능력, 외교정책 등을 언론, 대학교, 연구기관 등이 평가하여매긴 순위에서 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
1732년 버지니아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George Washington (1732- 1799) 은 이복 형인 버지니아 민병대장의 부관으로 군대에 입대, 전투 경험과 군 경력을 쌓아, 1755년 버지니아 방위군의 연대장을 맡았습니다.
뚜렷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워싱턴은 군대 경험을 통해 군사적인 기술과 정치적인 리더십을 축적, 특히 영국 군대의 강점과 약점, 전략과 전술을 익히게 되어 이런 배경으로 훗날 독립군의 총사령관직을 맡게 됩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후 고향인 Mt.Vernon 으로 돌아와, 1759년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연상의 미망인 Martha (1731-1802) 와 결혼을 합니다. 지적이고 기품이 있는 그녀는 뛰어난 농장 경영으로 자신의 농장을 합쳐 조지 워싱턴을 노예가 3,000 명이 넘는 버지니아 최고의 농장주가 되게 합니다.
1783년 12월 4일, 보스턴에서부터 시작된 영국과의 8년간 독립전쟁에서 승리,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1789년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에 선출합니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 같이 다재다능하지도 않았고, 제퍼슨 처럼 뛰어난 사상가도 아니고, 재무장관이었던 해밀튼 처럼 이론가도 아니었지만 이 모든 이들을 이끄는 중용의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이들의 이상주의를 목표로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인 보수성을 유지하면서 독립, 건국의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워싱턴의 인격이 잘 드러나는 한 부분은 대통령으로서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취임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의회가 대통령의 연봉을 2만5천 달러로 책정, 받도록 강권하자 워싱턴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후임 대통령들이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전례를 만들고자 마지 못해 수용 했습니다.
의회 의원들과 참모들은 유럽의 국왕에 견주기 위해 ‘대통령 각하’ ‘합중국 대통령 폐하’ 등의 경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워싱턴은 단호히 거절, 공식적인 명칭은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로 결정, 호칭은 ‘Mr. President’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에 명백히 재출마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해밀턴과 제퍼슨의 권유로 재출마, 4년 뒤 2차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습니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임기 조항이 없어 3, 4선도 제한없이 재출마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역사적 소명을 신생국의 기초를 놓는데 만족하고, 후임 대통령들이 더욱 발전 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장기 집권으로 인한 독재화와 권력집중을 막고 민주주의와 공화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워싱턴의 사려깊은 처신이 돋보였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두 번째 임기 종료 직전 고별 연설문 ‘미국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는 워싱턴 장군이 미합중국 국민들에게 드리는 연설’에서, ‘연방의 통합은 유지되어야 하며, 헌법의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법의 지배가 이루어 져야 하며 정당의 해악은 막아야 한다. 권력의 분립과 상호 견제는 지켜져야 한다.
국민의 덕성과 도덕은 국가에 중요하며 교육을 통해 함양해야 한다. 외국이 미국문제에 간섭하지 못하고 미국도 대외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국가와도 동맹이나 적대관계를 맺지마라. 균형 재정을 강조하며 국가의 신용도는 안보와 같다. 모든 나라들과 통상 관계를 가져라.’ 라고 하였습니다.
1799년 12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워싱턴이 서거하자. 미국인들은 수개월 동안 조의복을 입었으며,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10일간의 애도기간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습니다.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으며, 자녀가 딸린 미망인과 결혼하였으나 혈통을 잇지 못하였고, 독립전쟁 초기 Boston 전투에서 강력한 영국군에 패하여, 각 주에서 모은 와해 직전의 대륙군을 이끌고 Delaware 까지 후퇴하면서 거의 전쟁을 포기하였던 조지 와싱턴....
불굴의 의지와 리더쉽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8년만에 독립전쟁에서 승리...
미국 국민들은 그의 사후에 우표, 도시와 거리 이름, 대학에 워싱턴 명칭을 넣어 그를 기념하며, 중장에서 대원수로 추서,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가슴 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심한 치통으로 어금니 치아를 빼어낸 그의 볼 안쪽을 솜으로 채워 만든 초상을 1 불짜리 지폐에 넣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변변한 학위 하나 없는 워싱턴을 미국의 지성으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덮을 것은 덮어가며 인물을 아끼고 존중하는 이런 미국민의 국민성이 지금미국의 풍요와 번영을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