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를 하다

 

 

한국의 시부모님이 한 달간 방문하신다는 소식이다. 워낙 윤나게 살림을 잘 하시는 어머니라 아무리 애를 써도 티도 안날 것이 뻔하다. 책과 옷가지들을 치우고 꽃이나 사다 꽂는 것이 고작이다. 항상 식재료를 한국에서 가져와 아버님과 남편 음식을 손수 준비하셔서 음식 걱정은 안 한 것이다. 그런데, “얘야, 내가 이젠 집안일을 못하게 되었어. 기운이 없어서 오래 서 있을 수가 없구나. 하신다. 그간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진 것은 짐작했으나, 당뇨약으로는 조절이 안되는지 하루 한 번 인슐린 주사를 맞고 간경화와 골다공증약도 드신다고 했다.

 

 

풍채 좋던 아버님도 어머니 시중이 힘들었는지 많이 야위셨다. 워낙 자식들 신세 지는 것에 질색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약해진 부모님을 수수방관한 한국 형제들에게 화가 났다. 아니 멀리 산다는 이유로 자식의 의무를 못한 우리 부부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간 밀린 효도라도 하겠다는 듯이 매일 장을 봐서 종일 부엌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생선을 굽고 갈비찜에 꼬리곰탕, 매운탕, 각종 나물 등 내가 아는 한식 메뉴가 총 출동했다. 복숭아, 수박, 포도 등 캘리포니아의 넘치는 과일에 교회 집사님이 준 변비에 좋다는 무화과까지, 잘 드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굶으셔서 기운이 없었나보네, 늙으면 딸이 있어야 한다더니, 잘난 며느리 다 소용없어.” 쫑알대며 친정 부모 구박한 올케 원망하는 시누이처럼 분개하였으나, 과유불급이라더니 어머니의 당수치가 올라가는 비상이 걸렸다.

 

 

아들만 넷 두신 시부모님은 장남의 거듭된 결혼 실패 때문인지 나머지 며느리들에게 참 잘해주셨다. 결혼하고 20년이 넘도록 싫은 소리 한 번 들은 적이 없다. 군소리 없이 사는 것만으로도 효도로 여기는 집안 분위기였다. 집안 대소사로 음식 장만할 때에도 며느리들은 전유어나 부치고 설거지나 도우면 되고 나머지 큰일은 어머니가 다 주관하셨다. 철철이 고춧가루며 깨소금, 참기름 등속의 양념과 김치를 날라다 먹을 줄만 알았다.

 

 

세 식구 단출히 살다가 대학교 방학으로 딸도 돌아오고 시부모님까지 대식구 식사를 세 번씩 준비하려니 장난이 아니었다. 고두밥을 먹는 우리 식구와 달리 부모님은 진밥을 좋아하시고 애들은 이제 한식이 지겹다고 불평이다. 눈치 없는 남편은 평소보다 더 설거지를 돕는다고 부엌에 드나드니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 닮아 부엌일을 너무 잘 해,” 라고 급기야 한마디 하신다. 나도 내 아들이 나중에 부엌에 얼쩡거리면 싫을 터이니 충분히 이해하지만, 시어머니는 역시 시어머니구나 싶었다. 음식준비 외에도 대화 상대해드리려 장시간 같이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혼자 내 방에 와서 쉬면 혹시 뭔가 삐친 걸로 오해 살까봐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점심 차려 드리고 일 핑계로 나와 있는 몇 시간이 아니라면 어쨌을까 싶다. 중학교 교사하며 시집에서 살던 친구가 개교기념일에도 출근 하듯 집을 나와 온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났다. 아무나 시집살이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아버님이 화분 분갈이도 해주시고 1층 마룻바닥 걸레질도 윤나게 해놓으신다. 매일 아침 그간의 습관으로 어머니께 콩을 손수 갈아 주시는 덕에 우리도 콩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신혼 때 대치동 아파트 전세를 얻어 도배만 하고 들어갔다. 설거지할 때 낡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튀는 걸 보시고 얼른 상가로 가서 수도꼭지에 부착하는 샤워를 사와 달아주셨다. 그 이후로도 아버님께 받은 것이 많이 있지만, 수도꼭지샤워는 작지만 큰 감동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아있다.

 

 

집 근처의 Wayfare chapel에 갔다. 태평양을 배경으로 정원이 아름다운 유리로된 교회이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는 이번에 사드린 지팡이에 의지하여 아버님 손을 붙잡고 걸으신다. 남편은 늙은 부모님 모습을 간직하려는 듯 사진을 여러 컷 찍는다. 화장실 가고 싶다시는 어머니를 내가 모시고 가야 했는데 살가운 며느리가 못되는 나는 시어머니 손을 잡기가 어색하기만 하다. 마른 장작같이 메마른 손이 차갑다. 주름진 앙상한 손이 내 손을 꽉 잡는다. 늙으신 부모님이 속상하다. “아무쪼록 건강 잘 유지하시고 내년에도 꼭 오셔서 저 시집살이 시키세요, 어머니.”    (2010년) 미주중앙일보 창작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