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후회하기
신순희
요즈음 한창 물건 버리기를 하고 있다. 하루는 책을 정리하고 하루는 서류를 정리하고 또 하루는 그릇을 정리하고. 그러다 보니 가만히 앉아 있으면 뭐 버릴 거 없나 집안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단출한 삶이 미덕이라고 한다.
미국 올 때 단출하게 온건 분명한데 언제 이렇게 물건이 쌓였을까. 처음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곤 했는데 지금 이 집에 산지 어느덧 이십여 년이 흘렀다. 세월만 쌓인게 아니다. 뭘 그리 주워 모았는지. 고국에 두고온 것에 대한 향수인가 미련인가 버리지 못하고 따라온 지난 날에 대한 보상인가.
제일 많이 쌓인 건 레코드판이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시간 날 때마다 중고가게에 들렀다. 거기서 지나간 나를 찾았다. 바로 LP 레코드판이다. 턴테이블이 달린 라디오도 하나 구했다. 그 기분 얼마나 좋은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눈을 감고 주디 갈란드가 부르는 ‘오버 더 레인보우’를 들으면 꿈결같다. 흘러간 한국가요도 구했다. 게다가 서울에 가서 되찾아온 나의 레코드에는 김민기도 김추자도 있다. 지난 노래를 들으면 옛친구가 생각나고, 한 서린 창(소리)을 들으면 구부정한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걸 버려야 할지 두어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비우려는 욕심이 과했나 보다. 물건을 정리한다고 나대던 며칠 만에 나는 어쩌다가 그만 아끼던 턴테이블 세트를 버리고 말았다. 레코드판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 그걸 다 들어야 하는데 버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휘둘린 모양이다. 패밀리룸에 잘 버티고 있던 그 턴테이블은 카세트 플레이어와 카세트 녹음을 할 수 있는 귀한 제품이었는데도 ‘올드’라는 이름으로 밀려났다. 언제는 골동품이 우아하다더니 이제 와선 초라하다 여기는 나도 변덕이다.
그거 말고도 전축이 있긴 하다. 커다란 스피커 한 쌍이 늠름한, 카세트와 라디오는 성능을 잃고 오로지 레코드판만 틀 수 있는 턴테이블 LP 플레이어가 있다. 이 전축으로 판을 들으면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지, 베이스가 대단하다. 요즘 와서 볼륨조절이 잘 안 되어 이것도 수명을 다했나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 건재하다.
며칠 전 주말, 아들에게 동네 중고매장 ‘굿윌’에 이것저것 정리한 물건을 가져다주라면서 턴테이블과 스피커 세트도 버리라고 했다. 아이는 나를 힐끔 보더니 그럼 레코드판은 어떻게 들을 거냐고 물었다. 그건 여기 전축이 또 있으니깐, 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하나 봐둔 게 있었다. 대형마켓에 유명 자동차 모양을 본떠 만든 엘피플레이어가 나와 있는걸 눈여겨보았다. 새것에 대한 환상도 조금 있었다. 그거 하나 사면 라디오도 나온다니 됐다. 내가 지금 버리는 제품은 라디오는 성능을 잃고 카세트와 엘피만 작동하니까.
그게 끝이었다. 그 턴테이블과 영영 작별했다. 내가 그 후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아니,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물건을 버리고 이처럼 속상한 적이 없었다. 그러게 신나게 물건 버릴 일은 아닌가 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멀쩡한 그 오디오를 왜 버렸을까. 마켓에서 산 그 오디오는 텅 빈 깡통 소리가 났다.
온종일 그 생각에 가슴이 쓰리다. 남은 전축을 살펴보았다. 뒤를 보니 웬 전선이 그리 주렁주렁 달렸는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무겁기는 또 왜 그리 무거운지, 스피커 한 짝도 못 들겠다. 전선 하나를 잘못 만졌는지 갑자기 소리가 안 난다. 가슴이 덜컹, 이거마저 작동되지 않으면 저 많은 레코드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후회막심이다. 모든 것이 간편해지는 세상에 아니 이 구닥다리 무거운 짐을 이사할 때 어쩌자는 건지. 버리지 말아야 할 가볍고 간편한 오디오를 덜컥 버리고 나서 가슴앓이 할 줄이야.
월요일이 되자마자 굿윌로 쫓아갔다. 그게 거기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서. 누가 요즘 레코드판을 들을까 싶었지만, 아! 나는 몰랐다. 요즘 복고풍에 엘피판이 인기라는걸. 비디오 플레이어는 많지만 내가 버린 턴테이블은 어디에도 없었다. 행여 아직 남아만 있어 준다면 내가 거저 버린 그 제품을 돈을 주고 다시 사리라 마음먹었지만…내가 미쳤지, 그 멀쩡한 걸 왜 버려.
그 뒤로 나는 틈만 나면 인터넷으로 LP 플레이어를 뒤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쩜 그리도 많은, 이름도 모르는 회사제품 턴테이블이 많던지. 그사이 나만 몰랐다. 최신형으로 다시 턴테이블이 출시되고 있었던 것을. 공부 많이 했다. 앰프가 어떻고 파워 스피커가 어떻고. 점점 더 후회된다. 후회는 뒷머리가 없으니 잡을 수도 없다.
버리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나 없는 세상을 염려할 일은 더욱 아니다. 내가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은 미련 없이 내 물건을 버리겠지. 아니, 잠깐 상념에 잠길 수도 있겠다. 어차피 흔적 없이 사라지기는 힘든 일. 버리고 후회하는 것보다 짐 좀 남기고 간들 어떠랴.
그런데 오늘 난 또 지난 이십여 년간 모았던 편지를 정리하고 있다.
[2017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