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쓰기

 

                                                      신순희

 

어머니는 달력을 손수 만들었다. 스케치북 장에 달을 그렸다. 1부터 31일까지 숫자를 크게 써서 요일에 맞게 배열하고 토는 까만색으로 일요일은 빨간색으로 적었다. 그렇게 가로로 다섯 줄을 적어넣어 1월을 만들어 벽에 붙였다. 그리고 2 3 그렇게 달씩 2018 달력을 만들었다. 열두 달을 간격으로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어머니의 한해는 물처럼 흘러갔다.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 이러한 얘기를 들으니, 구순이 넘은 어머니가 돋보기 쓰고 굵은 사인펜으로 8절지 백지 장을 숫자 1에서부터 31까지 메꾸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어머니는 달력과 긴밀히 내통하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지만 다시 돌아오는 하루, 숫자에 X 표시를 하고 싶지 않다. 하루씩 지워가는 사람이 있다. 오늘이 지났다고 X 그으면 끝인가, 지나간 것은 잊으라는 걸까. 한해가 지난 달력은 온통 X밭이겠다. 허망하지 않은가. 가없이 돌고 도는 세상이다. 2018년이 끝나면 2019년이 오는 . 달력의 숫자 배열만 바꾸면 된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1월의 첫날 1이라는 숫자가 빨갛게 도드라져 있다. 새해 첫날 출발이 아니다. 시작은 한발 늦게 한다. 휴식 그리고 다음 날부터 순리대로 살라고 달력은 말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시계가 알려주듯이 해의 흐름은 달력이 알려준다. 열두 장을 하나씩 넘기다 보면 해가 가고 온다. 나는 부엌 앞에 달력을 걸고 날짜 밑에 그날 처리할 일이나 약속을 적어둔다. 2018 달력에는 유난히 병원 예약이 많이 적혀 있다. 건강에 신경 써야겠다. ‘어머니 소포라고 쓰여있는 날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북어채와 뱅어포를 보내 주셨다. 생일에 동그라미 쳐두던 일은 언젠가부터 빠졌다. 이젠 그날을 알아주면 좋고 몰라도 괜찮다. 어머니 생신은 음력이라는 핑계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자식들 생일에는 별표를 두었건만.

2019년에는 날씨도 기록해야겠다. 첫눈이 오거나 천둥 번개 치는 날을. 유난히 해가 밝은 날을. 기쁜 날도 표시해야지. 달력에 좋은 일을 많이 써넣고 싶다. 1월은 적게 먹기, 2월은 많이 웃기처럼 매달마다 작은 목표도 적어넣을까 한다. 지난 10년간 메모한 달력이 그대로 있다. 지난 가운데 찾을 일이 생기기에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일기가 아니라 달력에 간단히 적는다.

어릴 우리 집에 있던 일력이 생각난다. 권의 책처럼 두툼하게 묶여 있었다. 얇은 습자지에 커다랗게 쓰여있던 숫자 하루. 화장지가 귀하던 시절, 날짜가 지나간 숫자를 찢어 변소에 갔다. 나중에는 오늘이 가기도 전에 떼어버렸으니 일력이 아니라 화장지였다. 일력은 날마다 앞서가고 있었다. 용도 변경된 일력은 12월이 되기 훨씬 전에 사라져버렸다. 요즘도 일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다. 귀한 하루를 그렇게 한꺼번에 소비했으니.

지나간 달력은 책을 싸는 사용했다. 학년이 되면 달력 뒷면 하얀 종이로 교과서를 쌌다. 새로운 마음과 각오가 생겼다. 겉표지에 글씨로 과목명을 쓰고 아래에 이름을 썼다. 날이 갈수록 깨끗하던 싸개는 때가 타고 귀퉁이가 낡아졌다. 나의 다짐도 변해갔다. 달력이 넘어갈 때마다 기후도 바뀌고 하늘빛도 나무도 바뀐다.

달력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어머니처럼 달씩 달력을 직접 그릴까. 설날과 추석에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고 입춘을 위시해 24절기를 표시해야겠다. 음력 보름도 그믐도 작은 숫자로 적어넣자. 어머니 생신도 표시해야지. 양력과 음력이 공존하는 달력은 태평양을 오고 가며 흐르리.

 

 [2018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