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 낭송 후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함께
내가 만난 ‘애국자’ 스코필드 박사
에델바이스란 고귀한 흰 빛이란 뜻이며 알프스의 영원한 꽃으로 유명하다. 비바람 몰아치고 차가운 눈 보라 속에서도 강하게 살아남아 눈같이 하얀 꽃을 피우는 작고 약하게 보이지만 강한 꽃…별처럼 생긴 벨벳 같은 하얀 꽃은 순수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꽃이지만 내가 참 좋아했던 것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유럽 여행 중 스위스에 들러 알프스에서 자란 에델바이스 꽃을 말려 액자에 넣은 벽걸이를 사서 선물로 나에게 준 후 부터다.
하얀 꽃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벽에 걸어두고 볼 때마다 스코릴드 박사의 사랑을 기렸다. 그 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나오는 ‘에델바이스’ 노래도 한 몫을 더 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한 수도원에서 견습 수녀였던 마리아가 7명의 자녀를 가진 폰 트랩 대령 가정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자녀들에게 열심히 노래를 가르치면서 부인과 사별하여 고독했던 트랩대령과 로맨스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하자 알프스 산 정상에서 ‘도래미’ 노래와 ‘에델바이스’노래를 부르며 오스트리아를 타출하게 된다. 기타를 치면서 트랩 대령이 ‘에델바이스’노래를 부르며 사랑하던 조국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노래로 전달되어 참 감동적이었다.
그 후 3.1절 독립운동 기념일이 다가오면 스코필드 박사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은덕을 기리게 된다. 또 스위스에서 사오신 에델바이스 꽃이 늘 생각이 나 그의 고매한 인격과 정의를 위해 불의에 항거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그를 그리워 한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7년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 와 1919년 3. 1일 독립운동 때 삼일운동을 도운 공적으로 윤보선 대통령으로 부터 독립훈장 문화장을 수여 받았다. 그 후 1968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또 수여 받았고 우리나라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안장되었다.
청소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팔과 오른쪽 다리를 사용을 잘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셨다. 3.1일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암리 교회에 성도들을 모아놓고 일본 군인들이 불을 질러 학살한 사건을 사진을 찍어 세계만방에 일본의 비 인도적인 만행과 폭정을 영자신문을 통해 알렸던 우리나라의 애국자였다. 스코필드 박사를 암살하려는 일이 여러번 일어나 신변 안전을 위해 캐나다에 귀국했다가 1958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 와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1970년 4월 12일에 영면하셨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세균학과 병리학 등 수의학을 강의하는 교수이기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알게된 스코필드 박사는 나의 신앙의 멘토였다. 영어성경을 가르쳐 주셨고 그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한국전쟁 후 어렵게 공부하는 고학생들에게 장학금 모금운동을 세계적으로 하실 때 몸이 불편하셔서 편지를 많이 대필해 드렸고 고아원에 통역도 해 드리면서 참 친한 사이가 되었었다.
전 국무총리 정운찬 박사도 스코필드 박사로 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할 수있었다.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을 사랑한 위대한 애국심과 교훈은 횃불처럼 타 올라 우리들 가슴을 뜨겁게 해 준다. 에델바이스 꽃처럼 순결하고 고귀했던 그의 삶.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은 에델바이스 꽃처럼 불의에 절대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삶을 살았던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 그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훌륭한 인격자요 신앙인이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 중앙일보 '이 아침에/2019년 3월 7일
* 이 아침에
미주 만인에게 보낸
100년사 3.1 독립운동과
내가 만난 '애국자' 스코필드 박사.
박사의 애제자.
영문학자 김수영.
연연한 사제지간.
영원한 내조자.
김수영 작가는
정녕 미국의 명사입니다.
불휴의 ' 에델바이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신
스코필드 박사.
내조자 김수영.
수혜자 정운찬.
길이 청사에 남으리다.
김수영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셔야겠습니다
더욱 ' 자중자애'
빛나는
김수영의 문하사 일으키소서.
- 비 오는 아침에 노사 경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