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차이

                                                                                                         이희숙

 

 

 

커피잔에 빠진 파리

  커피 내음이 온 방에 그윽이 찬다. 구수한 향이 긴장을 풀어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준다. 수필을 공부하기 전, 간단한 점심을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다. 어디선가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 윙윙거린다. 눈앞에서 맴돌며 음식 위에 앉아 실례까지 범한다. 불청객의 출몰에 모두 신경이 곤두세워진다. 웬걸! 음식 위를 배회하던 파리가 방심한 탓일까? 커피잔 속에 빠졌다. 뜨거운 커피 물에 익사하다니.

"에구머니"

"빨리 버리세요, 아이 더러워!"

"파리가 불쌍하네요. 뜨거울 텐데!"

"파리가 없어져서 다행이에요."

깔끔한 분, 인정이 많은 분, 장소를 제공한 분, 지켜보던 사람의 각기 다른 의견이다. 서로 다른 자기의 견해에서 감정을 담아 이야기한다.

 

콜럼버스

  20181110, LA 다운타운에 세워졌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이 45년 만에 철거되었다. 또한 미국 연방 국경일인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 Day)로 바꾸는 도시가 늘고 있다고 한다. 1492년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에서 출항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인도인 줄 알고 정착했다. 그는 유럽의 시선으로 볼 때 신대륙을 개척한 영웅이었다. 위대한 모험가이며 탐험가이었다. 백인들은 그를 우상화했다. 미국의 수도를 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로 명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면, 콜럼버스는 오래전부터 미국에 살고 있던 원주민에게는 침략자였다. 삶의 터전을 빼앗은 총을 든 약탈자로 인식될 뿐이다. 인디언은 땅을 사랑하고 어머니로 여기며 살았다. 침략당한 후 생존하기 위해 자연 속으로 더 깊숙이 찾아들어야 했다. 황량한 사막과 돌멩이 산까지 거주지로 삼았다.

 

몬테수마 캐슬

애리조나주의 붉은 성지 세도나에서 20마일 떨어진 남쪽에 인디언의 옛 거주지를 찾았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좁은 길을 한참 들어갔다. 놀랍게도 앞 계곡에 물이 흐르고 뒤엔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병풍을 이루고 있는 빼어난 풍광이 펼쳐졌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맑은 물이 흘렀으리라. 절벽 위로 스무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5층 구조의 인디언 집단 거주지로 몬테수마 캐슬(Montezuma Castle)이라 불렀다. 동물이나 적을 피하고자 사다리를 이용하는 지혜도 엿보았다. 경이롭고 평화스러운 모습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그런데 안내 싸인 판에 아름다운 이곳에서 살던 인디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언젠가 사라졌다.’라는 슬픈 사연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뿐이랴! 인디언의 아픈 흔적을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푸른 나무, , 경작지가 없는 돌산 위에 형성된 호피 인디언 보호지역에서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를 몇 차례 개최했다. 순수한 어린 심령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갔다. 그곳의 황폐한 자연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생활환경 때문에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들이 잃어버린 터전을 풀 한 포기 없는 곳에서 일구며 아팠을 시간을 가늠해본다. 착취, 강탈당하는 종족 고난의 아픈 세월이 지나갔다. 원주민 집단학살, 전염병 전파, 원주민을 노예화한 콜럼버스의 잔혹성이 재평가를 받은 것이다. 역사는 살아서 이긴 자의 것이라 하지만 객관적인 잣대의 올바른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커피에 빠진 파리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콜럼버스는 침략자인가, 영웅인가? 인디언 보호지역은 인디언을 위한 정책일까 아니면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함일까?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본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세 이야기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 부지런함을 장려하는 격언이다. 상대적으로 일찍 일어난 벌레는 어찌 되는가?’라고 반문한다면. 누구의 측면에서 보아야 하는지가 생각의 여지로 남는다. 상황을 어떤 관점 (Point of view)에서 보느냐는 또 다른 가치관을 낳는다. 다른 방향의 삶을 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는 어느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