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두고 / 정조앤
비즈니스가 에스크로 중이다. 2~년 후에 은퇴하려고 한가할 때마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동안 일하느라 남편과 오붓하게 여행을 다니거나 취미생활을 함께 즐기지 못했다. ‘은퇴만 하면’이라는 전제하에 하나하나씩 버킷리스트를 만들며 흐뭇했다.
꿈에 그리던 은퇴를 앞당기려 한 계기가 있었다. 올봄에 관할 경찰서에서 미팅하자는 편지를 받았다. 무슨 일일까 걱정이 되면서도 지역 경찰에게 협조를 잘해 왔기에 다소 안심했다. 미팅이 잡혀 있는 날 남편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낯익은 경관 두 명과 젊은 여자 동양인 검사가 우리를 반겼다. 인사를 나눈 후에 여 검사는 한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우리 가게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하여 하나하나씩 짚어나갔다. 그중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비즈니스 건물 주차장에서 갱들이 마약과 총기를 거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갱들끼리 주고받는 SNS에서 만남의 장소는 'P 리커스토어'로, 그들 사이에서 이보다 편한 장소가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 염려하여 사전에 시큐리티 가드를 고용했는데. 이빨 없는 호랑이였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여 검사는 시큐리티 회사를 바꾸라고 조언해 줬다. 아는 회사를 소개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만약에 이 사항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는 가게를 문 닫게 할 수도 있고, 건물을 압류할 수도 있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나의 두 다리는 힘이 빠졌다. 그들 앞에서 버벅거리는 영어로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더불어 지역 갱들을 잘 단속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다음 날 당장 시큐리티 회사를 바꿨다. 그리고 안팎으로 경비를 철저히 했다. 낯선 시큐리티 가드가 정복 차림으로 가게 출입문에 서 있으니 동네에 소문이 났다. 하루에도 수없이 드나들던 불량배들이 차츰 발길을 돌렸다. 경찰서에서'P 리커스토어'를 주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나 보다.
그동안 주위에서 장사가 잘된다고 소문난 리커 상점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 빗장을 지른 것이 아님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다. 몇 번의 경고를 받았지만, 심중에 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에 지인 한 분은 경관과 마찰이 잦았다. 오히려 삿대질하며 무엇이 잘못인가 대들었다고 한다. 변호사를 고용해서 문제를 잘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에 손을 들었다. 몇십만 불 투자한 돈을 한 푼도 건지지도 못해 화병까지 얻어 안타까워했었다.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심장이 뛰고 조여 오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와 남편은 머리를 맞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민 온 지 37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쉴 때가 됐다고. 비즈니스가 잘 될 때 팔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오랜 시간을 자주 보아 왔던 손님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가게 단골손님 중에 노숙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 멕시칸 호세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잘생긴 외모에 바른 성품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가끔 일손이 달릴 때는 그를 불러서 일감을 준다. 부인과 아이들, 손주를 사진을 보여주며 행복한 웃음을 터트릴 때는 부러운 것이 없다는 표정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는 노숙자 생활이 편하다고 말한다. 흑인 할아버지 존슨은 시를 잘 짓는 분이다. 늘 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날이면 공책에 빼곡히 적힌 여러 편을 시를 읽어준다. 그 내용은 그들의 삶에 깃든 애환을 노래했다. 존슨을 보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미, 마미라고 부르는 아이들 여럿이 있다. 가끔은 물건을 슬쩍 집어가는 바람에 나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나타나서 겸연쩍게 웃으며 가져간 물건값을 갚기도 하여 미워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고맙게 대해준 친절한 동네 주민들이 있었기에 척박한 곳에서 오랜 시간을 버텼었다.
텔레파시가 통했을까. 어느 날 우리 가게를 몇 번 기웃거렸던 중동인 이 한인 브로커와 함께 나타났다. 그는 건물까지 사겠다며 당장 계약을 하겠단다. 시원시원한 성격이 맘에 들어 그러자고 했다. 그는 리커스토어를 십여 개를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의 브랜드로 프랜차이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우리보다 젊고, 경험도 많고, 가게 운영을 잘하는 사람을 만나니 청량 음료수 마신 기분이다.
은퇴하면 종종걸음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아침을 맞고 싶다. 모닝커피에 빵 한 조각이면 족하리라. 조간신문을 읽고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해야지. 그리고 남편과 바닷가로 산책하러 나가야겠다. 나란히 손잡고 걸으며 인생의 후반기에 대하여 소탈하게 이야기를 나누련다. 은퇴 후를 그리며 만든 리스트에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즐길 생각을 하니 행복하다.
2018년
이제 은퇴를 하셨으니 얼마나 홀가분 하실까요.
몸과 마음을 푹 내려놓고 그 동안 한 수고를 되돌아보며
참 잘했어요. 하고 칭찬해 주세요. 축하합니다. 은퇴. 그리고 새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