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시간


어릴 적, 알프스산에서 뛰놀던 하이디를 좋아했다. 오두막 다락에 올라 창가의 마른 풀로 만든 침대에서 꿈꾸던 하이디가 된 양 알프스의 소녀동화책 속에 빠져들었다. 단발머리 시절에는 문학 전집을 머리맡에 두고 잠드는 밤이 많았다. 여고 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받으며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고 글을 쓰는 취미도 가지게 되었다. 일기장에 앞날에 대한 작은 소망을 적어 곱게 간직했다. 국문학을 전공 하고 싶었지만 5남매의 맏딸인 나는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하여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며 일기 쓰기 지도를 했다. 어린이들에게 글을 통해 자기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는 일기 쓰기를 권했다. 어린 새싹들과 글로 소통하는 교직 생활은 즐거웠다.

스물다섯 살에 신앙과 가치관이 같은 전도사와 결혼했다. 그가 첫 번째 편지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보내주었다. ‘가지 않을 길의 두 갈래 길에서 사람이 적게 밟은 길을 택했다. 소명이라 생각하며 순종했다. 신앙 안에서 교우의 기쁨을 돋우어주고 아픔을 돌아보며 남편의 목회를 도왔다. ‘이희숙 선생은 십자가 뒤에 내려놓았다. 40년 동안 목사 아내로서 감정을 절제하고 기도 속에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 부족한 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도 체험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숙해지는 내 모습이 그려진 일기만은 포기하지 않고 썼다.

 

태평양을 건너와 낯 선 땅에서 앞만 보고 달렸다. 주 정부인가 어린이학교 (State Licensed Day Care Center)를 설립하여 성장시켰다. 하루 열세 시간씩 30년 동안 몸으로 부딪히며 어린이를 양육하고 교육했다. 섬세한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피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더욱이 다민족 어린이학교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정작 나는 한글표현이 어둔해지고 단어조차 잊은 채.

 

6년 전 사랑하는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그의 이별은 우리 가족에게 충격이었다. 동생은 사람과 자연을 사랑한 아름다운 영혼의 시인이었다. 고교 영어 교사로 학급 신문, 생활 수첩을 통해 학생 한 명 한 명의 인성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다. 정성만이 선생의 진정한 무기라며 어미 사자의 마음으로 어린 사자들에게 진리와 꿈을 일깨워준 진정한 스승이었다. 내가 이민 생활에 지쳐 아플 때는 같이 아파해 주었다. 누나를 어두운 창가에서 문을 열어 온 하늘을 밝히는 새벽달로 표현했다. 나는 동생을 떠나보낸 슬픔을 이기려 그가 남겨놓은 글을 정리했다. 시와 기도가 된 그의 글을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맑은 날 이관희 시집 <착한 소가 웃는다>, 산문집 <선생으로 사는 길>을 출간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도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내 마음을 주님께 아뢴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친다. 내 발의 등이며 빛이 되는 지침을 마음에 새긴다. 오묘한 진리의 표현과 시어를 발견하며 놀란다.

좋은 글은 깨달음과 지혜의 울림을 준다. 장영희 교수의 시와 수필을 읽으며 사색과 문학의 숲을 산책했다. 이근후 박사님은 은퇴 후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글을 썼다. 소유한 것을 나누는 노년의 자유를 이야기해 주었다. 김형석 교수님은 '100년을 살아보니'에서 나를 청년이라고 깨우쳐 주었다. 늦었지만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우리 내외는 즐겨 걷는다. 걸으며 발에 부딪히는 작은 생물을 사진에 담고 글로 표현해 본다. 함축된 단어와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 고심하는 시간을 갖는다. 불필요한 상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마음은 싱그럽다. 자연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글로 태어난다. 언어를 통해 생명이 잉태되니 기쁘다.

 

올해 1월에 대학동창회에서 재미수필문학가협회 김화진 회장님을 우연히 만났다. 성민희 이사장님을 소개받아 어린이 학교 교실 하나를 오렌지방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이 모임에서 작가들이 써 온 글을 같이 읽으며 공감하고, 평가해주는 진지한 모습이 참으로 훌륭했다. 나도 간직했던 글을 내놓아 지도받고 다듬으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타문화 속에서 이민자가 겪어야 하는 삶의 희비애환을 그리고 싶다. 디아스포라 문학의 범주에서 정체성을 고수하며 문제의식을 글로 표현하여 갈등을 극복하길 원한다. 다민족의 경계를 넘어 소통하는 가능성을 소리 내고 싶다. 진솔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그 속에 생명을 담고 싶다. 잔잔한 감동으로 풍성한 삶을 위한 에너지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4. 29.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