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m 2 Rim
정조앤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 선물 가게에서 Rim 2 Rim 배지를 보았다. 장엄한 계곡이 빼곡하게 새겨진 직사각형 모양에 한 도보 여행자가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공예품이다. 귀한 보물을 만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선뜻 집어 들었다.
그랜드 캐니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여행을 계획하는 방문객들은 주로 South Rim을 가는 것으로 여길 만큼 일반적이다. 그에 비해서 노스 림은 인적이 드물고 바람 소리만 나는 협곡 가장자리에 있다. 두 구간의 거리는 평균10 마일(16km) 정도이지만 직진으로 건너가는 길이 없다. 사우스 림에서 차를 타고 노스 림으로 가려면 220 마일(354km)을 돌아가야 한다. 구간을 잇는 케이밥(Kaibab) 등산로를 따라 걸어갈 경우에는 24마일(38.6km) 이다. 도로와 방향이 완전히 달라서 둘 중 어디를 가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노스 림으로 향했다. 5월 마지막 주간 메모리얼 연휴를 맞아 캠핑하기 위해서 떠나는 길이다. 초반에는 황량한 사막이 나타난다. 애리조나주와 유타주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울창한 숲속을 지나게 된다. 케이밥 내셔날포레스트 (Kaibab National Forest)로 접어들었다. 애리조나 주에 속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침엽수로 둘러싸인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하이킹 클럽에서 림에서 림까지 당일치기 종주를 계획했다. 북쪽의 고도는 8,000피트(2,438m) 이다. 남쪽보다 1,000피트(305m)가 더 높은 곳이다. 24마일을 걷는데 평균 15시간이 걸린다. 하이커들 사이에는 동료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자신이 없다면 망설임 없이 포기해야 한다. 순전히 나와 힘겨루기 싸움이다. 종주에 참여하는 17명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적병과 싸우러 가는 군사와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다.
새벽 6시를 지나서 노스림 케이밥 산길로 걸어 들어갔다. 내리막길이다. 2마일 지점에 있는 슈파이 터널까지 단숨에 걸어온 것 같다. 화강암에 둘러싸인 장엄한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감탄사를 쏟아냈다. 멋진 사진으로 남기려고 무게를 잡기도 했다. 브라잇 앤젤 계곡을 깎아 만든 카이밥 트레일은 아찔하면서도 짜릿한 순간이 있었다. 하바수 폭포를 지나고 코든 우드 캠프장에 도착했다. 7마일 거리를 힘들지 않게 걸어온 셈이다. 오는 동안 충분한 물과 에너지를 섭취했다. 중간 지점까지 가려면 5마일이 남았다. 하이커들에게는 왕복 10마일이 적당하다. 기준치에서 벗어나면 근력이 저하된다.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때로는 멍하니 길을 걷는다. 협곡의 원시적인 속살을 보면서 맨 밑바닥에 당도했다.
팬텀 렌치 (phantom Ranch) 통나무집이 보인다. 남쪽과 북쪽에서 내려온 하이커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펄밋을 받으면 이곳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신발 끈을 풀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수돗가에서 펌프질한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과 혹사한 발을 살살 문질러가며 닦았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콜로라도강을 건너기 전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사서 마셨다. 기운이 난다.
사우스 림과 노스 림의 경계선, 콜로라도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강 하류에서는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긴 철제다리를 건너서 사우스 림으로 들어갔다. 하루 중 가장 덥다는 오후 2시쯤 피할 수 없는 곳에 다다랐다. 그 지형은 오목한 항아리 속 같이 생겼다. 그늘도 없고 바람도 없다. 한증막처럼 푹푹 찌는 화씨 100도를 웃도는 열기 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1,200 피트 경사면을 더위와 씨름하며 헉헉거리며 오른다. 한 뼘 그늘이라도 보이면 주저 없이 퍼질러 앉는다. 차라리 쓰러져 잠을 자고 싶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능자의 도움이 간절하다.
한 발 한 발씩의 위력은 대단하다. 어느새 죽음의 계곡을 벗어났다.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뜨거운 볕에 벌겋게 익어버린 머리와 얼굴을 물속에 한동안 담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얼마 남지 않은 인디언 캠프장을 향해서 두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곳은 숲이 있고 벤치가 있어서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쉼터가 된다. 잠시 숨을 고르며 브라이트 엔젤 협곡을 바라본다. 사우스 림은 부드럽고 연한 빛깔의 사암으로 지층을 이루고 있다. 햇살 무늬가 짙어가는 초저녁, 이 시간에 3마일을 더 가야 한다. 거리는 3,300피트이다. 1마일에 1,000피트를 오르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는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어둠이 찾아왔다. 기온 차로 몸이 써늘하다. 헤드램프에 의지하여 컴컴하고 좁다란 흙길을 한없이 걸었다. 두런두런 말소리에 위를 올려다보니 불빛이 환하다. 드디어 정상이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다가와서 환호하며 기뻐해 준다. 쾌쾌한 땀 냄새가 낯설지 않다. 그것마저도 향기롭다.
배낭에 붙인 Grand Canyon Rim 2 Rim 배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나는 또 다른 도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