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니 산 (Mt. Whitney) 정상에 오르다
정조앤
미국 본토에서 최고봉인 위트니 산(Mt. Whitney)은 도보 여행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정상은 높이가 4,421m이다. 산에서 캠핑을 하려면 오버나잇 허가서(Overnight Camping Permit)가 필요한데 연초에 추첨을 통해서 받는다. 당일치기는 론 파인 레인저 스테이션(Lone Pine Ranger Station)에 가서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려야 한다. 하루에 오버나잇 캠핑 50개, 당일치기 산행 150개로 제한한다.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마라톤 완주보다 어렵다는 당일치기 등정에 나섰다. 왕복 22마일 거리다. 나와 여동생을 포함한 우리 산악회 회원 8명은 론 파인 레인저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는 하이커들로 붐비고 있었다. 등정하는 인원수대로 퍼밋 용지와 용변 비닐 주머니 8개를 받았다. 멀리 위트니 산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어둑새벽, 위트니 포탈 (Mt. Whitney Portal 2,548m ) 주차장에 도착했다. 고산 지대에 서 있으려니 어질어질하다. 시작도 하기 전인데 고산증을 느끼고 있으니 제대로 다녀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예방약 애드빌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새벽 2시에 입산하여 늦어도 저녁 10시까지는 이곳 포탈에 도착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만약 정상을 밟지 못한다 해도 위트니 산의 정기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출발이다. 머리에 헤드램프를 둘렀다. 불빛을 보고 모기떼가 몰려든다. 쫓아도 달려드는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보폭을 늦추지 않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만 산을 울린다. 새벽 공기가 청량하다. 걷기에는 최상의 기온이다.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 쉰다. 온 산야가 고요하다. 망망대해 같은 검푸른 하늘에 반짝이는 크고 작은 별 무리가 길동무 되어 걷는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린다. 온갖 소음에 길든 귀가 순해지는 힐링 타임이다.
미러 레이크 ((Mirror Lake)를 지나면서 날이 차츰 밝아진다. 해발 3,243m 지점이다. 뒤를 돌아본다. 저 거친 계곡 사이를 어둠을 뚫고 밤새 걸어서 올라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태양이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른다. 장관이다.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본다. 두 팔을 높이 올리고 새날을 여는 기운을 가슴에 안는다. 심호흡하며 재충전을 한다. 그래, 나는 해낼 수 있어! 우리는 정상을 함께 오르는 거다.
트레일사이드 메도우(Trailside Meadow 3,472m) 초원을 지나면서 봄날 같은 아침 햇살이 어깨를 감싼다. 잠깐 쉬었다가 숨을 고르며 다시 걷는다. 가도 가도 앞에 보이는 것은 암석이요, 발에 밟히는 것은 자갈이다. 지그재그로 오르려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몸이 지친다. 그럴 때마다 고통을 인내하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문득 눈을 드니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찌를 듯한 바늘 모양의 기암 석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뾰족한 봉우리마다 햇살을 맞아 찬란하게 빛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광이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말뜻을 실감했다.
오버나잇 하는 하이커들은 이곳, 트레일 캠프 (Trail Camp 3,669m)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재충전을 한다. 당일치기는 연속으로 강행군이다. 우리는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힘들 때마다 에너지 바와 사탕을 먹으면서 견뎠더니 뱃속이 더부룩하고 느끼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고 싶다. 하지만 고산에서는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다. 소화가 더뎌서 체하기 때문이다.
고산에서는 용변이 자주 마렵다. 불편하지만 도리가 없다.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나눠준 비닐봉지에 담고 꽁꽁 묶어서 배낭에 매달고 다녀야 했다. 3,048m 이상은 흙이 없고 암석이라서 묻을 자리가 없다. 바위틈새에 버리고 간 얌체족들의 것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단다. 자신의 배낭에 남의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내려오는 하이커를 종종 본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이커들이다.
99 스위치백(Switchback 3,907m) 암벽을 바라보았다. 아흔아홉 번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고난도 트레일이다. 캠프 트레일(3,686m)에서 트레일 크레스트(4,192m) 지점까지는 2.7km 정도의 거리지만 고도 상으로는 273m 올라가야 한다. 고산증을 이겨낸다면 스위치백을 무사히 통과하고 정상까지 갈 수 있겠다. 스위치백을 오르면서 사계절을 경험한다.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쌓인 곳과 작은 시냇가, 바위틈에 끼어 자라는 보라색 들꽃도 보인다. 암벽 틈새로 흐르는 물줄기에 목을 축이며 갈증을 해소했다. 그곳은 발을 헛디딜 경우 추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긴장을 멈출 수가 없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디딘다.
트레일 크레스트 (Trail Crest 4,192m) 구간과 만나는 지점이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봤던 바늘 모양의 기암들이 바로 눈앞을 가로막고 버티어 서 있다. 색다른 경험이며 감동이다. 좌우로 둘러보니 병풍처럼 둘러싸인 광활한 시에라 산맥이 눈 앞에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존 뮤어 트레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위트니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4km 구간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보다 훨씬 험했다. 날이 선 봉우리 뒤편으로 오르는 길은 울퉁불퉁한 암석을 깎아서 만든 돌밭, 그 길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자칫하다가는 수천 길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아찔한 곳이다. 이 길에서는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가 나타나면 두말없이 뒤돌아서서 내려가라고 한다. 나는 아직 조금 어지러울 뿐, 구토 증세는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다.
앞서가던 일행의 음성이 무전기를 타고 들려온다. 레인저가 말하기를 먹구름이 몰려올 것 같으니 안전을 위해서 하산하는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고산에서는 천둥과 번개가 치면 비가 올 확률이 높아서 전기에 감전되거나 벼락을 맞아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순순히 뒤돌아서서 내려갈 사람이 있겠는가. 유심히 앞을 바라보니 모두가 전진하고 있었다. 막 정상을 밟은 첫 주자에게서 다시 무전으로 연락이 왔다. 비가 올 기미는 안 보이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올라오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이 솟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숨은 더욱 가빠지고 내 발걸음은 천근같이 무겁다. 발이 땅바닥에 붙지 않고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머릿속도 멍하다. 젊은 외국 청년 하이커들이 지나가면서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응원을 보낸다. 때마침 몇 발자국 앞서 걷던 여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피소 지붕이 보인다고 소리친다. 심장이 터질 듯 감격했다. 마지막을 앞둔 지점에는 벽이 있다고 한다. 이 관문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에 한 발 한 발에 힘을 실었다. 정오 12시 30분, 마침내 정상에 도착. 억누를 수 없는 감동이 나를 덮친다. 동생과 나는 울먹이며 부둥켜안고 껑충껑충 뛰며 기쁨을 나누었다.
양팔을 높이 들고 위트니 산의 정기를 온몸에 담는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방을 보아도 먹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흰 구름 몇 장이 두둥실 푸른 하늘을 떠다닐 뿐이다. 산 아래 풍경이 어렴풋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올라왔던 길, 숨을 헐떡거리며 힘들게 걸어온 길이 아득하게 구릉 너머로 보인다. 지나온 길은 아름답다 했던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힘들고 가슴 아린 순간들도 생각해보면 한바탕 추억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 삶이 아니던가. 위트니 산 4,421m 정상에 서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 그리고 자연의 순리와 그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인다.
대피소 앞 작은 상자 안에 놓인 <위트니 산 방문록>에 사인을 한다. 손이 떨린다.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이 순간을 위해 반년 동안의 준비 과정과 지난 몇 시간에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위트니 산을 오르며 겪은 고통은 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밑 거름이 되어 주리라.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