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떠난 가을 순례 ( 1 )
하늘로 치솟던 초록들이 이젠 지쳐 마지막 수분을 마음껏 토해내고,
산들바람에 영롱한 장식을 채비하기위한 황금빛으로 변하는 계절.
허드슨강이 흐르는 가든 스테이트의 한 모퉁이에서 가을 언덕을 향하여
오래 만에 여행을 떠난다.
생활주변을 둘러싼 틀에 박힌 일상을 잠시 벗어나, 소박하고 평화로운 미지의 세계로 높은 하늘 한조각의 구름에 실려 떠나간다. 세상 탁류 속에 흘러가는 내 자신을 붙잡아 보며,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찾아 생명의 고향으로 나들이, 파아란 하늘처럼 맑고 순수하고 싶다.
“빈손으로 왔다가 아무것도 가져 갈 것이 없는, 이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순례 객 입니다.오늘부터 진정한 나그네 되어 당신의 인도를 따라, 저 하늘 흰 구름 한 점에 실려 흘러갑니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흘러가오니, 이 발길을 아름답게 지켜 주소서! “
거추장스러운 짐이랑 떨치고 가벼운 여장으로 홀가분하게 떠난다. 지난날의 여행이란 것이 빽빽한 일정으로 대중속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여 부자유스럽던 여행이 많았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학업과 직장으로 멀리 떠나있는 그 곳에서 머무르면서 마음대로 돌아 단니 면서 방황하리라.
언젠가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되면 서울로 돌아가리라는 처음계획은 빗나가고, 세월은 흘러 이 땅에서 다 성장하여 결혼으로 직장으로 학업 따라 이산가족이 된 지금, 나는 초로의 황혼문턱에 서 있다.
그들이 떠나 남긴 텅 빈 공간은 가을 들판처럼 허전하며, 때론 적막이 감돌기도 한다.
자녀들을 위하여 이 땅을 밟아 왔다면 무엇을 얻었으며, 또 무엇을 잃었는가 !나의 미완성을 찾아 그 들의 완성을 향한 결실로 보람을 찾아 살아왔단 말인가. 언젠가는 부모 슬하를 떠나야할 그들인 줄 알면서도 끈끈한 혈육사랑의 촛불은 늘 가슴에 타며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지나가다가 저물면 그들의 옆에 들려 이슬 젖은 가족사랑에 많은 대화로 긴 밤을 세워주는 말동무도 되어 주리라.
잿빛구름을 벗기고 해바라기처럼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뉴왁 상공으로 떠 오른지 한 시간 반만에 오하이의수도 콜럼버스 상공을 펼치고 있다.
아침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하이오는 넓은 황금바다가 물결치는
농촌평야로 뻗어 있어 전형적인 미국의 전원도시임을 직감할 수 있다.
천백만의 인구,42,000평방마일, 미국의 주요산업의80%을 점유하고 있는 이곳, 1,800년 초부터 자립자족 경제를 확립하였던 오하이오는 바다처럼 뻗어나가 초원과 황야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지평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하이오 동맥, 애릭호수는 크레브렌드를 중심으로 갈매기가 군무를 이루는 낭만의 곳이기도 하지만,수심이 깊어 9개의 항구로 세계 상업중심지의 교통요지가 되고 있다.
역대 8명의 대통령을 배출해 왔고, 비행기 발명가인 라이트형제와 잭니콜라스 골프왕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참전군에 군량미(곡)를 70%이상 공급하였던 곡창지대이기도 하다. 미시시피 강은 오하이오강이 원줄기로 연간 수송물량이 8천만톤 이나 되어 파나마운하의 2배가 된다고 하니
미대륙에서 오래 살아갈수록 구석 구석 가는 곳마다 새삼스레 놀라운 세계로 접어들게 한다.
콜럼버스 공항에 마중 나온 아들을 보자 서로 반가워 모든 사람들이 거의 빠져 나갈 때 까지 끝없는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들이 엄마의 눈가에 물기어린 모습을 보자 짐 가방을 든 체 공항 밖을 재촉한다.
시내에서도 60마일을 질주할 수 있는 도로를 달리며, 그의 마을숙소에 들어서자 그림 같은 연못에 피어나는 안개가 지붕위로 아름답게 흘러가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몇 시간 여독을 플고 난 다음, 오후 아들의 안내로 가까운 골프장으로 갔다. 엄마는 골프공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날라 가도, 풀밭에 풀어 놓은 토끼처럼 아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신이난 모양이다. 필드를 거닌지 얼마 안 되어 하늘에 먹구름이 묻어오더니 천둥소리에 사방이 컴컴하기 시작 하였다.
동시에 크럽 하우스에서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옛날 민방위 훈련 때처럼 귀가 따갑게 들려 왔다. 뉴욕지역에서 경험 못한 훈훈한 인심에 뜻밖의 rain check를 받고 밖으로 나오니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아들은 “아빠 엄마께서 뉴욕에서 비를 몰고 오셨군요” 하며 기뻐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두 달 이상 비가 오지 않아 곳곳에 도로 공사로 먼지가 일고 있었고, 일부 골프장이나 도로변의 푸른 잔디가 금잔디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랜 가뭄 후의 비는 연인처럼 반갑고 상큼하여 풋풋한 풀 향기가 스며들어 오히려 상쾌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이었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 지도를 펴며 내일부터 순례 일정을 대략 잡기로 했다.
우선 여기가 관광 명승지대는 아니더라도 광활한 농촌을 가로지르며 바다와 같은 시원한 들판을 달리고 싶었다. 농촌 곳곳을 지나가며 평소 호기심으로, 유명하다는 Living Bible Center와 에미시의 집단 거주지,
Amish County 지역을 중점으로 순례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미시간 주를 뛰어 넘어 바다 호수에 던져진 눈사람 같은 미시간의 가을 공원을 거닐고 싶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Heny Ford Museum과 그린 필드 빌리지를 방문할 계획을 잡았다.
밖에는 깊은 밤 풀벌레소리가 애처롭게 가을을 재촉하는 듯 선명하게 들려온다. 엄마는 이곳 특산물인(?) 옥수수와 밤을 잔뜩 삶아 식탁위에 풀어 놓고 밤참에 얘기꽃을 피우며 그 동안 궁금한 아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특유의 웃음으로 집안 사열을 하기 시작한다.
장남이 한국에서 초등 학교을 마치고 바다건너 온 것이 그나마 뿌리 통체로 옮기지 않은 것 같아 다행으로 생각하여 왔고, 평소 양쪽 문화를 잘 소화하는 생활 태도에 대견스러워 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가까이 있을 수 록 더욱 안쓰러워지는 것일까. 구운 밤을 까서 먹기 좋게 아들 입에 넣어주는 엄마의 사랑은 오랜 품 안을 떠난 장성한 자식인데도, 모성 본능의 발로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정성을 본다.
세상 만사가 너무 쉽게 변하지만, 한결같이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닐까. 모자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가끔 웃음 퍼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이제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당신이 되어버린 이 순간에 나는 내일을 위해 잠자리로 들어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