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되었을 때 / 정조앤
해오르기 전에 하이킹(Hiking)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등에 짊어진 배낭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발걸음도 사뿐하다. 한나절만큼은 세상일 접어 둘 생각이다. 걷다가 힘들어지면 쉼표도 찍고 감동을 할 때는 느낌표도 찍으리라.
지난 여름 큰 산불로 엄청난 손실을 낸 Angeles National Forest, Red Box 에서 첫 산행을 시작했다. 산 중턱에 올라서니 시커멓게 그을고 뒤틀린 나목들이 온 산야에 널브러져 있다. 마스크를 해야 할 정도로 잿가루가 폴폴 날리는 숲길을 걷고 있노라니 마음이 무겁다. 계곡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새들과 곤충들은 둥지를 찾아 떠나버린 듯 적막하다. 길섶에는 힘들게 비집고 올라오는 야생 풀의 여린 모습이 안쓰럽다. 잿더미로 변해 버린 그곳에도 느린 걸음으로 오고 있는 봄을 보았다.
완연한 봄인데도 불구하고 Mt. Baldy 산봉오리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다. 샌 버나디노와 LA 카운티의 경계에 놓여있는 남가주에서 세 번째로 높은 1만 64피트인 볼디 산은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다. 정상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대머리산'이라 불린다.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 산중에 첫손가락을 꽂을 만큼 인기가 많다. 맑은 날이면 LA의 웬만한 곳에서도 다 보일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일 년 내내 산악인들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한국 등산객들의 숫자가 타 인종을 능가한다니 뿌듯하다.
볼디 산은 7,000ft까지는 자동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도로가 잘 닦여져 있다.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다 보면 100피트 높이의 샌 안토니오 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아직 녹지 않은 잔설 사이로 수정 같은 물줄기가 힘차게 흘러내린다. 그곳에서 태곳적부터 이어온 푸른 숲길을 따라서 숨 가쁘게 오른다. 고산증에 어지럽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느릿느릿 걷고 쉬어 가면서 중간 지점인 스키헛 하우스에 다다랐다. 앞서 와 있던 몇몇 일행이 반긴다. 저 멀리 눈 덮인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는 대원들이 보인다. 오랫동안 산행을 하면서 단련된 체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정상에 오르리라는 희망을 가슴에 안는다.
산행은 힘들수록 즐거움도 배가 된다. 겨울에는 눈 내리는 산길을 뽀드득 소리 내며 걸을 때도 있고, 봄이면 바닷냄새와 들꽃 향기를 맡으며 해변 언덕길을 걷는 낭만도 있다. 걷다 보면 신선한 공기가 체내의 불순물을 제거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다. 북풍을 등에 지고 따사로운 햇살을 머리에 이고 갈 때도 있다. 산속에 들어와 있으면 각종 식물과 꽃과 곤충과 벌레가 서식하는 자리, 그곳에서 원초적인 향수를 느낀다. 저희끼리 소통하는 모습이 마냥 부러워 정신없이 바라본다.
세상의 짐이 나를 무겁게 누를 때마다 산이 그립다. 훌훌 던져 버리고 숲속으로 달려가고 싶다. 자연에 스스럼없이 안겨 풍경이 되었을 때 고요함에 젖는다. 그대로를 받아주고 품어주는 듬직하고 과묵한 산을 생각하면 생기가 돈다. 어디에 서 있던지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오랜 세월을 줄곧 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산, 그런 산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살고 싶어 또 산을 찾는다,
" 산이 좋아 산에 산다네"라는 싯귀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