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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가을은/ 정조앤                                                           

 

  여름의 끝자락에서 인생의 가을을 맞았다. 봄날에 피워 오르는 사랑도 뜨거운 여름날의 열병도 채 식지 않았는데, 서늘한 가을바람 앞에 서게 되었다. 휑한 바람이 가슴 안으로 들어와 휘젓고 있을 때 가을을 찾아 나섰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도 계절의 변화는 오고 있었다.

  비 포장된 가파른 도로를 따라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갈수록 시냇물 소리가 정답게 들려왔다. 숲속에서 만난 실개천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사르르 살얼음도 보였다. 잔설이 남아 있는 높은 산등성을 앞에 두고 더는 올라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산과 숲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호수에 은빛 물결이 반짝이며 유유히 흐른다. 하늘을 우러러보니 고요한 깊은 호수를 닮았고, 호수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닮았다. 끝없이 빠져들 것 같은 하늘은 분명 지나온 계절의 하늘 그대로이다. 백인 노부부는 몇 개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송어 떼가 오기를 한가로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서 삶의 여유와 평온함이 보인다.

  고산지대에서 서식하는 은사시나무들을 깊은 산중에서 만났다. 은빛 알몸이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동전 모양의 작은 잎새들은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황금빛에서 갈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가랑잎들의 맑은소리가 천상의 화음으로 들린다. 아름다운 울림은 호수 주변을 감동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자신을 보듬어준 나무에 낙엽들은 보답하듯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려 한다. 떠나는 뒷모습이 실로 정갈하고 고귀하다. 

 가을은 밖으로 맴돌았던 자신을 안으로 불러들여 성찰하고 사색하는 계절이다. 세월에 녹슨 마음을 닦으며 깨끗한 영혼을 간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런 계절이기에 느끼는 감정이 남달라야 함에도 쓸쓸하고 외롭다는 상념에 젖는다. 올곧은 생각보다 덧없는 욕심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다. 자연 앞에서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겸손함을 배운다.

 가을은 관조하며 살 나이가 됐다. 가장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 때가 지금, 이 순간이다. 고운 단풍으로 물들기 위해선 햇빛과 바람과 물이 절실히 필요하다나에게 햇볕은 따뜻한 가정이고바람은 나의 감성이고물은 내게 좋은 양서가 아닐까. 이렇듯 좋은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한동안 살았다.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직시하며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가을은 혼자 있으면 멋이 있고 둘이 있으면 낭만이 있는 계절이라고 시인이 말했다. 외로움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그리움을 화폭에 담는 멋진 인생을 꿈꾼다나무에 달린 아름다운 단풍처럼 나의 인생도 조금씩 황홀하게 물 들어갔으면 좋겠다. 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곱게 물든 단풍이고 싶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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