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 제인 / 정조앤
제인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온 지 이십여 년이 되어간다. 2남 1녀를 둔 오십 대 중반인 러시아인이다. 건강미 넘치고 활달한 제인, 그녀의 남편 폴은 곱상하고 눈빛이 선한 사람이다.
어느 날 제인 집 앞에서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낯선 사내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걸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초인종 누르는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더니 제인이 그 어린 꼬마와 문 앞에 서 있었다. 내 시어머니에게 이 소년을 소개해 주고 싶어 왔다고 한다. 그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아이는 제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수줍은 얼굴로 "나는 아브라함이야"라며 고개를 숙였다.
제인은 아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아브라함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증손자를 입양기관에 맡겼단다. 그 아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수시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고 한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자그마한 체구, 웃는 모습이 그의 할머니와 시어머니 모습이 비슷하게 닮아서 아이가 할머니를 그리워할 때마다 데리고 와도 되겠는지를 묻는다. 도움이 된다면 무슨 부탁인 줄 들어주지 않겠냐고 말했다. 어린아이가 가여워서 입양했다는 제인, 그녀는 함께 사는 남매도 러시아에서 입양한 아이들이라고 그날 우리에게 말했다.
제인 부부는 러시아에서 살 때 두 아들을 낳아서 길렀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여름방학 동안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보냈는데 귀국 길에 비행기가 추락하였다. 그 사고로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우울증까지 겹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 고통 중에 부부는 약속했다. 먼저 세상을 뜬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 말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좋은 일을 하자고 다짐했단다.
그들 부부는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세 아이를 데리고 장거리 캠핑을 떠난다. 심신을 단련시켜서 건강한 자녀로 성장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집을 비울 때면 집 열쇠를 내게 맡긴다. 집안 화초 물 주기와 새장에 사는 새들에게 모이 주기를 부탁하면서 무척 미안해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불신의 담이 높아가는 세상에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웃들과의 소통을 누구보다도 잘하는 그녀는 동네 골목 안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누구든지 손 내밀면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는 이웃사촌, 제인 부부이다.
제인은 아들과 함께 내 시어머니가 계시는 양로병원을 자주 방문했다. 얼마 전 우리집 이층 계단에서 낙상하셔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눈을 맞추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와 한국어로 손짓으로 대화한다. 무엇이 통했는지 파안대소하며 손을 맞잡는다. 피붙이보다 살갑게 대하는 제인은 시어머니를 맘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이 만든 카드를 보여준다. ' 하루속히 건강 되찾아서 집으로 오세요.' 라고 적혀있다. 그녀는 출입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위해 병실 안을 봄 풍경으로 장식해 놓았다. 남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늘 말씀하셨던 시어머니, 그녀는 제인이 그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며느리인 내게도 그렇게 살라고 당부한다.
오늘따라 아브라함이 좋아할만한 선물을 사 오라고 재촉하신다. 마음먹은 김에 제인 것도 사야겠다.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