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인플레이션

                                                                                                                                                                              김화진

그녀의 나이 이제 46. 열 여덟, 열 세 살 두 아이의 엄마. 멋진 남편을 가진 예쁜 아내다.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미사가 끝난 성당 마당에 전에 본 적이 없는 젊은 엄마가 눈에 뜨였다. 백일이 갓 지났을 법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차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갔다. 인사를 하며 궁금한 마음을 전했다. 이후로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물론 자매처럼 지내게 되었다. 벌써 17년 전의 얘기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쉰 목소리가 낯설어 처음에는 감기가 걸린 줄 알았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갑상선 암이라니. 남편의 사업을 도우며 아이들 양육에 늘 바삐 살던 사람이 아닌가. 하루라도 그녀 없이 가정과 가족이 유지될 수 있는가. 내 마음의 염려는 그 깊이와 종류를 끝없이 확장해 가며 밀려오는 아픔으로 할말을 잃었다. 이제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가. 이어서 진행될 일들을 애써 태연하게 설명하는 동안 나는 오래 전 내 모습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합격의 기쁨을 채 느낄 겨를도 없이 우리집엔 찬 바람이 불었다. 엄마가 자궁암 진단을 받은 일이다. 고도의 현대 의술로도 아직 완치의 방법이 없다는 병, 무서운 암이었다. 8개월 후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똑같은 나이, 그녀의 아들이 내가 느꼈을 그때의 감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눈물이 흐른다.

미리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다. 누구보다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나지만 마음을 통제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깨달은 까닭이다. 어느 것 하나도 내 염려로 인해 결코 가벼워지거나 지워지는 일은 없다는 확실한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만 벌어진 일을 작게 만들거나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깨우침이다. 언제나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이 생겨나면 연달아 어려운 문제가 또 따라오는 상황이 반복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세상에서 나만이 겪는 것 같은 자괴감과 실망 속에 주저앉아 있던 근심의 늪도 있었다. 돌아보니 참 아픈 시간이 길게도 지나갔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몰고 온다. 밤잠을 놓치고 아침까지 이어지는 생각에 이끌리는 때는 좋은 일로 설레인 경우보다 대부분 어떤 염려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중학교 2학년의 기억이다. 성적표를 받아 들고 걱정에 휩싸였다. 전 학기에 받았던 성적에서 반드시 향상되도록 노력할 것을 엄마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느라 꼬박 날이 샜다. 막상 그로 인해 걱정했던 야단은 맞지 않았다. 괜한 염려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억울하기마저 했다. 이후로 나는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여유로 살아온 듯 하다. 결코 해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말하고 싶다.


경제학에서 인플레이션(inflation)은 전반적인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플레이션이 과도한 통화량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는다.  화폐의 팽창이 물질적 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지나친 걱정이 나를 조여올 때 내 삶은 평안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람을 빼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시 그녀와 앞으로의 치료를 위한 방향을 나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으려 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를 최대한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일일테고 우선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겠다. 몸이 아플 때의 외로운 느낌을 내 경험을 통해 절감하기에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제발 이 시련을 잘 극복하기를. 걱정의 인플레이션을 디플레이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과 상관없이 오늘은 지나고 또 내일은 찾아올 것이므로.  끊임없이 내 속에서 들려오는 걱정의 숨소리가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