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여, 돌아오라 / 김사랑
안개 자욱한 이른 새벽, 초행길인데도 두렵지 않다. 온통 주위는 고요하다. 내 마음은 어수선하다. 긴 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날밤을 새웠지만 더 이상 집에 있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이곳은 내가 늘 다니던 길이 아니다. 무작정 산에 올랐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는 기분이 전과는 사뭇 다르다. 평소 산에 올라와도 약수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오늘은 목을 축이고 마음도 축인다. 새벽어둠은 도둑고양이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져간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안개는 어둠을 내몬다. 그러나 나의 어두운 그림자는 나를 더욱 흔든다.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나의 소중한 보물을.”
벤치에 앉는다. 아침햇살이 안개를 비질하고 있다. 깨끗하게 쓴 마당으로 바람에 밀리는 낙엽이 너풀거리듯 나의 그늘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다. 분을 삭이지 못한 나는 센바람에 달려가는 낙엽이 되어 숲속을 질주한다. 달려보아도 화가 그러지지 않는다.
요즘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동탄에 사는 딸이 둘째 아이를 가졌다. 임신만 하면 10개월을 누워 지내야만 하는 ‘고 위험 산모’가 된다. 엄마가 되어 이런 딸을 돌봐주지 않을 수 없어 몇 개월 동안 동탄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두 집 살림을 했다. 몹시도 버거운 생활이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옥죄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냥 숙명으로 알고 참고 견디는 중이다. 공적으로 나가는 문학 세미나의 날을 이번처럼 기다린 적이 없다. 그날에 만날 문우들을 그리워해서라기보다 우선 처한 현실에서 하루라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내일 있을 세미나 준비를 위해 서울 집에 왔다. 짐을 꾸리던 중이었는데 뭔가 자꾸 허전하다. 노트북이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남편에게 물으니, 사용하는 노트북은 가지고 간 줄 알았고, 헌 것으로 알고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이쿠, 이일을 어쩐다. 그동안 쓴 원고를 하드 데스크에 모두 저장해 두었는데, 뛰는 가슴을 안고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달려갔다.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늘이 노랗고 심장박동이 빨라져 숨 쉬기도 힘들었다. 마음속에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 지나고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얼른 집으로 가 노트북을 찾는다는 문구를 썼다. 중요한 자료를 보고 나서 다시 노트북을 돌려주고 사례하겠다는 문구까지 써서 아파트 출입구마다 붙여 놓았으나 아무 연락이 없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곳에는 내 수필 모두가 들어 있다. 수십 년 동안 자식처럼 보듬은 내 글들. 비록 졸고라 해도 밤을 새워 살을 녹이며 쓴 글이 아니던가. 그 많은 밀어들을 담고 있는 나의 작품들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얗다. 나의 삶 전체가 알몸이 되어 세상에 떠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니 망년자실, 소름이 돋고 울분만 남는다.
내 글도 글이지만, 아이들의 뜻 깊은 날의 기록은 어찌하란 말인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던 날의 기록, 아들딸들의 성장 과정을 담아 놓은 사진, 손자 손녀의 귀여운 모습, 그 동안 문학행사에 다니며 찍은 숱한 사진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요즘은 합성기술이 발달하여 나쁜 사람들이 사악한 장난도 한다던데. 연예인들의 사진도 합성하여 인터넷상에 띄워 공공연하게 떠도는 게 사실 아닌가. 만약 그렇게 약용되면 어쩌나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나는 물론 아이들의 사진이 합성되어 세간에 떠돌아다닌다면 그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광활한 바다에 내몰리어 안개처럼 부유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펑펑 울었다.
“내가 잠깐 돌았나봐. 병원 가서 치매검사라도 해야 할까 보다.”
추궁하는 내게 남편이 위로랍시고 던진 말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소릴 질렀다. 남의 소중한 물건을 마음대로 내다 버린 남편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며칠을 소리 지르고 밤새도록 잠 못 들고 괴로워해도 소용이 없었다. 혹시나 하며 휴대폰을 잠시도 놓지 않고 기다렸지만 집 나간 노트북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지독한 열병에 걸렸다.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느라 아픔도 모를 만큼 그냥 지나가지만 밤에 눈만 감으면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온몸에는 두드러기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라며 건강을 챙기란다. 하지만 노트북의 상실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그 숱한 사연들과 이별 의식도 치르지 못한 채 빼앗기고 말았다. 진즉 다른 곳에 저장 해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차일피일 미뤄온 지난 시간들이 후회의 늪으로 몰려든다. 작품집으로 묶어야 한다는 주위의 말을 가볍게 넘긴 것이 후회스럽다. 노트북과 지냈던 그 세월이 얼마인데 헤어지는 의식도 없이 이렇게 헤어지고 말다니.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내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이는 얼음처럼 굳어 있다.
“아무래도 치맨가봐.”
자꾸 이 말만 반복하기에 정말 저이가 치매면 어쩌지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든다. 치매일까 봐 걱정거리 하나 더 얹어 이중고에 빠진다.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에 저러려니, 너무 내몰았나.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나쁜 일 생기는 게 어디 나뿐인가. 그러려니, 저러려니, 노트북 때문에 남편과 헤어질 수도 없는 일. 이 말 저 말 하지 말고 새 노트북이라도 사 오면 화가 좀 가라앉으려나. 아니야, 그 노트북도 침상에 앉아서 편하게 그 쓰라며 사다 주지 않았던가. 현재로서는 그 어떤 보상도 위안이 되지 않아.
세미나에 참석하러 떠났다. 행사를 마쳤지만 집으로 돌아오기 싫었다. 화를 삭일 겸 며칠 더 쉬었다 갈까 갈등이 생겼다. 이참에 집 나간 마음을 더 오래 지속시키면 괜찮아질까. 이래저래 궁리해보았다. 남편은 아무 말하지 않을 게다. 문우들에게 하룻밤 더 놀자고 권해보더라도 누가 동조해줄까. 결국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와 피곤하다는 핑계로 이른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건네준다. 빼앗듯이 물건을 받아보니 세상에나 그동안 애써 찾던 노트북이다. 남편을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뛰다가 잠에서 빠져나오니 꿈이다. 깜깜한 밤에 홀로 깨어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을 바라보는데 그도 크게 한숨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