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2015
그날도 여전히 출근하자마자 주말의 바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맡게 된 환자의 인계를 받고 그 환자를 만나기 위해 수술대기실로 갔다. 그곳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60대 중반의 부부를 만났다. 부인이 응급수술을 해야 해서 남편이 보호자로 함께 따라온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수술로 응급실을 통해 바로 입원을 해서 그 환자는 긴장된 모습으로 여러 사람이 분주히 물어대는 질문에 떠듬떠듬 대답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수술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을 점검해 가다가 그 환자가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수술을 하는 동안 몸에 여러 종류의 전기기구를 사용해서 금속류를 착용하면 위험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그 환자는 자신이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남편에게 맡겨야만 했다. 모든 준비가 거의 끝나고 수술실에 막 들어가려고 하다가 우연히 그 부인의 손가락에 또 다른 반지가 끼어 있는 것을 언뜻 보게 되었다. 또 다른 반지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마치 부끄러운 일을 하려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남편이 결혼반지를 빼내면서 대신 펜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보자고 했더니 그 부인은 멋쩍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그 부인의 손가락에 파란 펜으로 반지가 그려져 있었다. 남편이 그려놓은 반지는 어렸을 적 내가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서로에게 그려준 반지보다도 더 엉성하고 예쁘지도 않았다. 선이 비뚤어져서 반지의 모양은 반듯하거나 고르지도 않고 울퉁불퉁 해 보였다. 아마도 다그치는 병원 사람들 때문에 남편은 급하게 서둘러 그려야만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나이가 들어 반지를 그리면서 손이 떨렸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반지는 지금까지 본 어떤 반지보다도 아름답고 값져 보이기만 했다. 남편은 갑작스러운 수술로 불안해하는 부인에게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엉성하고 비뚤어진 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반지지만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부인이 수술을 받는 동안 자신이 그곳에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을 주고 영원히 사랑한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응급실로 오느라 헝클어진 빨강 머리의 노부인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함께 급히 짐을 챙겨 따라온 청바지 차림의 남편의 모습은 잘 차린 그 누구의 모습보다도 멋지고 훌륭해 보였다.
새해 전야에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다가 아들에게 칼로 머리를 찔려 응급수술을 하면서 새해를 맞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어느때 보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들로 시작되어야 할 새해 아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에게 칼부림을 당하고 수술을 받고 있었다. 그 아버지에게 머리보다도 더 크게 상처 났을 아픈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갱단의 총싸움에 아무 연관도 없는 10대 소년이 총에 맞아 수술실 테이블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일이 있었다. 비명에 간 아들을 끝내 보내지 못하고 밤새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 보아야만 했다. 20대 한국 여자가 캐나다에서 라스베가스로 여행하러 와서 돌아가기 바로 전날 사고로 수술을 받게 된 일이 있었다. 떠나기 전날 저녁에 친구와 헐리우드 거리를 거닐다가 느닷없이 보도로 뛰어든 차에 치어 한쪽 다리를 잘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다른 부위의 출혈이 또 발견되어 밤새도록 수술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 후에 의사소통도 안 되는 낯선 남의 나라에서 한동안 돌아가지도 못하고 온갖 불편함을 겪으면서 지내야 했다. 엄청난 고통과 불편함 속에서도 잘 참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자면서 자신도 모르게 팔로 아들의 기도를 막아 뇌사에 빠뜨린 젊은 아버지를 만났다. 아들의 장기기증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실로 보내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던 모습을 보았다. 그 아버지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아픔을 생각하며 가슴이 퍽이나 쓰리고 아팠다.
엘에이 한복판에서 밤마다 일어나는 끔찍하고 가슴 아픈 사고들을 주로 목격하며 지내는 내게 그 부부와의 만남은 정말 오랫만에느껴 볼 수 있었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