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여름 / 한복용
푸른 물감을 맘껏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 해변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따라 호텔에서부터 십여 분쯤 걸어 나왔다. 멀리 타우루스산맥이 건너다보이고 바람은 그곳으로부터 줄기차게 불어온다. 망연히 서서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을 바라본다. 그동안 내가 맞이하고 싶었던 여름과의 거리는 눈 덮인 산과 안탈리아 해변의 사이만큼이나 멀었으리라.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바다는 주름진 얼굴로 끊임없이 내게로 향해 달려온다.
이곳에 다시 오기까지 나는 몇 년을 망설였던가. 오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히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첫 방문은 10년 전, 겨울이었다. 그땐 성난 파도 위로 거대한 줄기를 뻗은 눈 덮인 타우루스산맥만 눈에 들어왔었다. 그 겨울에 글과 사진으로만 보았던 풍요의 여름, 지중해를 꿈꿨던 나는 그리도 원했던 안탈리아 해변에 앉아 혼자만의 여름 축제를 열고 있는 중이다. 거침없는 햇살이 빽빽하게 내리꽂혀 눈을 멀게 하는 곳,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면서부터 설렘으로 가득했던 곳, 나는 지금 해변으로 가 앉는다. 바다로 오는 길에 스쳤던 후텁지근한 바람이 이곳까지 따라와 갈증을 부추긴다. 호텔에서 챙겨온 맥주 한 캔과 몇 개의 과일을 백팩에서 꺼낸다. 부풀어 오른 맥주 거품을 시원하게 들이켠다.
오후로 건너온 햇살은 더욱 뜨겁게 나의 등을 데운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의 살결을 폭 좁게 혹은 넓게 아코디언 연주하듯 어르며 자유자재로 불어댄다. 내 곁을 스치며 몸을 간질이기도 한다. 몇 모금의 맥주를 넘긴 나는 고운 모래를 손바닥 안에 쓸어 담아 흘려본다. 삽시간에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나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그 모습이 마치 영원으로 가는 시간과도 같다. 가는 모래는 운동화 속에도 스며든다.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끌어내린다. 그 순간 내 주변의 풀들이 소스라치듯 놀라고 파도는 포효하듯 소리친다.
신화가 꿈틀대는 타우루스산맥을 다시 건너다본다. 햇빛이 되비치는 해변에 앉아 나는 몇 천 년 전의 올림푸스 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연다. 하마 알제에서의 까뮈도 그랬을까. 「결혼, 여름」에서 알제의 궁핍함이 까뮈로 하여금 그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곤 하지만 압도적인 지중해의 풍요야말로 그에게는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알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건 태양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태생적으로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꺼려했다.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무튼 다시 찾고 싶은 이유 하나쯤 남겨두는 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공통적 소망인 듯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바람과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걷고 싶어서다.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마시다 만 맥주를, 겨드랑이엔 신발을 감춘다. 많은 사람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모래사장에 엎드려 내리쬐는 태양을 맘껏 덧입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웬일인지 금세 익숙해진다. 그들 옆으로 자잘한 파도가 들고나는 길을 따라 나는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안탈리아 해변은 잔돌이 어여쁘다. 색색의 무늬가 박힌 납작하고도 뭉뚝한 돌들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타우루스산맥으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 굴러왔을까. 어쩌면 어느 여신들의 장신구가 풀어져 바닷물에 씻기고 파도에 닳아 이리도 고운 빛깔을 낸 것이 아닐까. 나는 신발을 구겨 가방에 넣고 돌을 줍기 시작한다. 주머니가 금세 불룩해진다.
넉넉한 햇빛과 마법의 바람, 신화 속의 보석과도 같은 돌이 있는 지중해의 여름 바다와 마주하기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주저를 끌어안고 있어야만 했던가. 생업을 뒤로 하고 무턱대고 떠날 수 있는 용기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생의 에너지를 얻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거기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부추겼다.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열망은 삶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까뮈가 말했던가. 그의 한 마디가 내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다. 지중해 바다에 앉아 삶의 무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의 삶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보따리를 꾸릴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몇 년 전 지중해의 그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갔던 그곳을 눈에 아른거리게 했다.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목뒤로 넘긴다. 알싸하고도 시원한 맛이 온 몸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나에게 여름은 늘 뜬구름과도 같아서 어쩐 일인지 한 번도 열정을 쏟은 기억이 없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려 애썼을 뿐, 혹독한 겨울 한 가운데에 멈춘 채로 여름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삶에 대한 배신행위를 벗어나기 위한 어떤 모험도 그동안 나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작디작은 변화조차 두려워하면서 안일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엔 굳은 결심으로 길을 나섰고 지금의 나는 지중해의 여름과 하나가 된 듯하다. 가끔 몸과 마음이 절정에 이를 수 있도록 뜨거워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한 번도 일탈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 일은 필연적 경험이 되고 말 테니까.
알싸한 취기에 젖어 나는 강렬한 태양 아래 천천히 몸을 눕힌다. 타우루스산맥은 만년설의 흰 띠로 내 옆에 와 나란히 눕는다.
이 고요, 시간은 내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