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파는 빵집 / 구활
우리 동네에 마들렌(Madeleine) 빵집이 문을 열었다. 빵을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마들렌이란 이름에 끌리는 게 있어 언젠가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일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벼른다고 실행에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들렌 빵집은 이 길을 지나칠 때마다 ‘한 번 들어와 보지도 않고 그냥 갈거야.’ 하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빵집과 나 사이에 밀고 당기는 간격의 실랑이는 시가 되고 때론 수필이 되었지만 눈길을 피하는 외면으로 일관했다. 그러기를 두어 달이 지났을까. 어둠살이 끼는 초저녁에 그 집 앞을 지나다 보니 오늘은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고 진짜 마들렌 빵집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 같은 우아한 착각에 내 자신이 묶이는 것 같았다.
통유리 진열장 옆에 달린 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들렌 빵 있습니까” “우리 가게 빵은 모두가 마들렌인데요.” “혹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에서 주인공이 먹었다는 그런 마들렌 빵이 있습니까. 홍차에 찍어 먹으면 맛과 향이 좋은….” “우리 가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파는 빵집은 아닌데요.” 젊은 여자 점원과 농담을 계속 하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섯 같아 홍차 아니라 꿀에 찍어도 맛이 없어 보이는 목침처럼 생긴 빵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을 산 적은 있지만 읽지는 못했다. 앞부분의 십여 페이지를 읽긴 읽었는데 재미가 없었고 문장도 너무 길었다. 앙드레 모루아는 “세상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읽은 사람의 부류에 들기 위해 책을 샀지만 결국 안 읽은 부류에 속하고 말았다. 재미에 치중하면 깊이를 잃어버리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IQ84』라는 소설에 주인공 덴고와 아오마메의 대화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봤어요?” “당신은,” “난 교도소에 간 적도 없고 어딘가에 오래 은신한 적이 없었어요.” “주위에 누군가 다 읽은 사람은 있어요?” “없을 걸요. 아마.” 그들도 나와 비슷했다. 그렇다고 프루스트 탐구를 위해 도둑질한 죄로 감방에 갈 수도, 산사에서 면벽 가부좌하고 참선하는 스님이 될 수도 없어 실로 난감했다.
그런데 스페인의 최고 레스토랑인 엘 세에르 데 칸 로카의 셰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힌트를 얻어 마들렌 향이 느껴지는 ‘오래된 책(old book)’이란 디저트를 창조해 냈다. 100년 전에 출간된 책의 속지를 기름에 넣어 향을 추출한 에센스를 투명 액체로 만들어 그걸 종이 과자에 뿌려 마들렌의 맛을 풍기도록 한 것이다. 책을 읽지 않고서는 이런 고통이 수반되는 작업을 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옛날에 봤던 영화나 소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다.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완벽하진 않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치매 노인의 뇌처럼 망가져 쉽게 망각으로 이어진다. 생각 속에 어쩌다 떠오르는 장면들은 왜곡되거나 부풀려져 덧칠한 그림처럼 투명성을 잃게 된다.
어쩌면 프루스트도 그런 과정을 겪은 끝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는 빵집 진열장에 있는 마들렌 빵을 보기만 했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콩브레란 마을에 머물 때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인사를 하러 가면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 주는 마들렌을 그때 처음으로 맛보기 시작했다. 그때 아주머니가 베풀어준 마들렌이란 미각의 향연은 오랜 세월 동안 소년의 의식 속에 무의식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작가가 된 후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리라.
그렇다. 프로이트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선택적 망각’이란 이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은 무의식 영역으로 밀어내 버리고 유리한 기억만 뇌리 속에 보존하려는 인간의 알량한 습성을 이렇게 정의한 것이다. 소설 속 마들렌의 기억도 이 같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우리의 뇌는 한 가지 일을 회상하려고 할 때 이미 저장되어 있는 다른 기억들을 쉽게 잊어버린다. ‘망각 적응설’로 알려진 이 이론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 이전에 먹었던 다른 음식의 맛들을 깡그리 잊거나 잃어버린 게 이 이론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입심 좋은 긴 문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어디선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를 채우고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감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프루스트가 기억하는 마들렌 향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오묘한 것일까. 혹시 그의 기억이 왜곡된 함정이랄 수 있는 오류의 덫에 걸린 것은 아닐까. 기억이란 놈은 ‘마음 내키는 아무 곳에나 드러눕는 개’처럼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노는 싸가지 없는 괴물이다. 내가 먹어 본 목침 마들렌이 별 맛이 없었다고 이렇게 딴죽을 거는 것은 아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기억 속에서 건져낸 한 조각 추억의 빵일 뿐이다. 그 추억을 아름다운 하얀 쟁반에 담으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립고 아쉬운 회상거리가 된다. 작가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과 향을 회상 차원에 올려놓고 쓴 글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불후의 명작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도 콩브레 마을의 레오니 아주머니 같은 정겹고 친절한 이웃 아주머니가 풋보리를 찧어 만든 개떡을 사카린 물에 찍어 먹여 주었더라면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다니는 유명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의식의 곳간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기억들을 아무리 뒤적여 봐도 마들렌 빵과 같은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도 건져 낼 수가 없다. 고향마을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린 기억들만이 내 영혼의 빈칸을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