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의 언어와 나비의 언어 / 이어령

 

 

 

탐화봉접(探花蜂蝶)이란 말이 있듯이 벌과 나비는 꽃을 찾아다닌다는 면에서 같은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벌과 나비처럼 대립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벌은 꽃을 향해서 곧바로 날아간다. 그것들은 가능하다면 최단거리의 일직선을 택해 날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비는 그렇지 않다. 나비는 곧장 꽃을 향해서 나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위로 아래로 혹은 좌우로 변화무쌍한 곡선을 그린다.

  벌이 꽃을 향해서 행진을 한다고 한다면 나비는 꽃을 보고 춤을 춘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꿀을 따려는 목적은 다 같아도 이렇게 그 방법이나 태도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길로 갈라져 있다. 꿀을 따기 위해 일직선으로 난다는 것은 벌의 근면성을 상징한다. 한눈을 팔지 않는다. 오직 벌이 그 날개를 움직이는 것은 꿀을 따오기 위한 '노동'속에서만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꽃을 향해 날아가는 벌은 공장의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하늘하늘 날면서 꽃의 주변을 맴도는 나비는 노동이나 근면보다는 쾌락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단순히 꿀을 따는 목적만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꽃 그 자체와 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의미를 전달한다는 같은 목적이라 할지라도 '벌의 언어'와 '나비의 언어'는 서로 다르다. 꽃 그리고 꿀. 언어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다. 일상적인 자연 언어나 과학적인 '메타'언어들은 벌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가고, 시인의 언어는 나비처럼 복잡한 곡선을 긋고 움직인다.

  빵을 굽는 사람이 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빵이면서 동시에 빵이 아니라 마치 예수의 말처럼 그것은 육체일 수도 있고,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뜻할 수도 있다. 시인의 언어는 코드에서 일탈하고 또 변칙을 일으키면서 메시지 주변을 맴돈다. 어는 때는 메시지보다도 오히려 그러한 나래의 움직임 자체가 더 소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비록 나비가 먼 길로 일탈하고, 또 오랫동안 허공에서 맴돈다 할지라도 벌과 다름없이 결국엔 꽃에 가 앉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목적인 꿀을 얻는다는 것이다. 벌은 규율이나 조직력, 자기 희생의 가혹한 집단적인 힘ㅡ 이를테면 노동을 통해서만 꿀을 얻을 수 있지만, 나비는 자유와 즐거움 그리고 자기 표현의 기쁨 속에서 그 꿀을 획득한다. 꿀벌에게 있어서 꿀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나비에게 있어서는 설령 꿀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춤'만은 남는다.

  즉, 나비는 그 자체가 꽃을 닮은 존재다. 꿀을 닮은 존재다. 그러나 벌에게 있어 꽃과 꿀은 단지 욕망의 목적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벌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 같은 독침이다.

  시인들은 '벌의 언어'가 아니라 '나비의 언어'로 이 삶의 의미를 따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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