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구두 / 정수경
키도 줄고 자존감도 줄어들고 마음까지 얇아지는 것 같다. 갱년기가 시작되려는지 어느 순간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아주 낯설어졌다.
해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앞으로 나는 어찌해야 하나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들자 불안했다. 초조해졌다.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이 탓인지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길가에 핀 꽃도 예뻐 보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돌마저도 짜증이 났다. 신경질이 뿔처럼 곤두설 대로 서 있다 보니 가족들에게 괜스레 짜증을 냈고 나 자신에게마저도 그랬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걸까. 계속되는 낯섦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러다간 나머지 삶은 황폐해지고 키는 더 많이 줄고 자존감은 주식처럼 바닥을 칠 것이고 마음은 얇아져서 그 두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여행을 다녀봤지만 만족되지 않았고 영화를 보러 갔으나 집중하지 못했다. 가족끼리 식사도 같이 했었으나 어떤 것으로도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어봤지만 그것 또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수다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우울을 더 깊게 만들었다. 모두 다 실패, 모든 것이 실패였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갱년기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나쁜 기분은 부풀고 늘어났다. 탱자 가시처럼 더 단단해져만 갔다.
남편이 백화점 상품권을 말없이 건네주었다. 나의 짜증으로 집안 공기도 탁해지고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원인 제공자인 나의 기분을 전환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사고 싶은 것 사면 기분전환이 될까 싶었나 보다.
뭔가 답답한 일이 생기거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여자들은 머리를 자르거나 집안 정리를 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해소시키는 경우가 있다. 쇼핑을 좋아하진 않지만 상품권도 있으니 쇼핑을 갔다. 백화점 매장을 어슬렁어슬렁거렸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저들은 어떻게 이 위기를 넘겼을까?
걷다가 나의 눈으로 쏘오옥 들어온 그것, 뾰족구두였다. 매장에 들어가 신발을 신었다. 그것과 내가 합체가 될 때 키가 훌쩍 커지고 동시에 줄어들었던 자존감도 솟았다. 뿔처럼, 바로 이거다 싶었다. 커지는 느낌으로 내려다보는 느낌으로 우울에서 우뚝 서는 것. 두 말할 것도 없이 뾰족구두를 안았다. 뾰족 솟은 자존감 때문이었는지 기분이 좋아졌다. 뾰족구두는 안도감이다. 작은 위안이다.
자동차 조수석 한 귀퉁이에 뾰족구두를 싣고 다닌다. 가라앉으려 하는 기분을 업 시키려고 할 때 나는 그 구두를 신어본다. 여지없이 키는 커진다. 아직까지 갱년기 전선에는 이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