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
신순희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같은 모습은 아니다. 긴 세월,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포효하며 위엄을 보인다. 1980년 5월 18일 미국 워싱턴 주 남쪽에 있는 명산 세인트헬렌스가 폭발했다.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른 것은 오리건 주에 살 때였다. 누군가 말하길 워싱턴 주에 있지만, 오리건에서 가기에 더 가깝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이 산이 영영 회복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다시 만들어지는 자연을 볼 수 있다고.
화산 폭발한 지 십수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나무였다. 시커멓게 화상을 입고 타버렸다. 뿌리째 뽑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누워있는가 하면, 겨우 서 있어도 골격만 남은 몰골이었다. 호수에 수장된 나무도 보였다. 계곡에는 회색 물이 꿈틀거렸다. 바위도 벌판도 수묵화처럼 검었다. 침엽수림이 울창하던 푸른 산이 이처럼 암울하게 변하다니. 삼라만상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황폐한 산 검은 산.
치유할 수 없으리라는 예상을 엎은 건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였다. 등산로 곳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노란 줄을 치고 사람의 발바닥 그림을 그려놓고 X자를 그었다. 연약한 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 만지지 말라는 경고였다. 풀 한 포기. 삶은 이처럼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상보다 속히 치유되고 있는 세인트헬렌스이다. 일백 년이 지나야 자연 생태계가 회복되리라 했지만 십여 년이 지나자 산은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했다. 자연은 사람이 해치지 않는 한 강건하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전망대에서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분화구에서 연기가 희미하게 오르고 있었다. 언제 또다시 분노할지 모른다. 살아 숨 쉬는 산이다. 세인트헬렌스산(Mt. St. Helens)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높이 2950m산이었지만 그해 화산폭발로 꼭대기가 푹 패여 떨어져 나가 2550m로 낮아졌다. 마치 두뇌의 일부가 사라진 모습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머물러야 비로소 산이 보이는 것. 산은 애초에 그곳에 있었다.
전망대 극장에서 폭발 당시 산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를 보았다. 산은 핵폭발이 일어난 듯 검은 회색 구름을 뭉게뭉게 한없이 토해냈다. 마그마가 휩쓸어버린 계곡에 진회색 물이 꾸역꾸역 하는 수 없이 흘렀다. 산꼭대기 만년설도 함께 녹아내렸다. 생나무들과 그 잔해들이 강물에 가득 넘쳐 떠내려가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날짐승도 산짐승도 몰살했다. 산의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벌목한 듯 널브러졌고 들판은 폐허가 되었다. 산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길래 깊은 속을 그토록 쏟아낸 걸까.
산은 모든 길을 잃었다. 청량한 숲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감만 남았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57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람에 실린 화산재는 150여 Km나 떨어져 있는 시애틀까지 날아갔다. 아니 다른 주까지 날았다. 산은 숯검정이 된 심정을 바람에 실어 멀리멀리 퍼뜨렸다. 본시 인간과 자연은 하나인 것을. 사람의 발길이 끊길 것을 두려워했을까.
희망은 늘 푸르다. 화산 폭발한 이듬해 삼월, 사람들은 이 산에 상록수 묘목을 심었다. 쓰러진 나무들은 흙이 되어서 자라나는 묘목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산의 길을 만드는 건 사람의 발자국이다. 오르지 못하는 산은 산이 아니다. 오르다 말지라도 도전해 보라고 산은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세인트헬렌스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사한 뒤로 나는 서너 번 더 이 산을 찾았다. 그때마다 산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십여 년 전 시애틀에 오신 어머니와 함께 이 산에 올랐다. 관광객을 위해 산 중턱까지 길이 잘 다져져 있다. 그렇다 해도 경사진 길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염려해 한국에서 기운이 난다는 링거 주사를 맞고 오셨다. 그 힘으로 앞장서 산에 오르셨다. 전망대에 도착해서야 허리를 펴고 움푹 팬 산 정상을 유심히 바라보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묻지 않았다. 이제 어머니는 이 산에 오를 수 없다. 지난해 고관절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지만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 모른다.
생명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예측을 불허한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회복되고 있다. 세인트헬렌스산에 보라색 들꽃이 피어나고 산새가 낭랑하게 노래하고 엘크가 돌아오고…. 어쩌면 어머니도 예측과 달리 일어설지 모른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아 신록의 계절에도 산은 아직 무채색이지만 가슴에는 신선한 바람이 분다.
그날, 1980년 5월 18일 태평양 건너 한국 광주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2017년 7월]
--대표에세이문학회 '쉼' 2017--
시애틀에 갈 때마다 멀리 보이던 마운트 헬레나를 기억합니다.
검은 산에서 새로 일어서는 생명을 알아보는 작가의 눈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