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재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늘 중년이다. 아버지는 환갑의 나이에 돌아가셨는데도 지금도 나의 아버지, 하면 반사적으로 중년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중년을 나이로 환산하면 서른 살에서 쉰 살 정도일까. 연부역강. 사나이로서는 알맞은 경륜에 자신감 있는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황금기다. 그렇지만 내가 아버지를 중년으로만 기억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열세 살이 되기 직전의 겨울, 나는 전형적인 사춘기적 증상과 맞부딪쳤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주제 파악 불량에서 기인하는 자존망대형 조발성 천재 증후군'이라 하겠는데. 그 증상은 먼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일단 그 증상에 관해 아버지의 아들인 이상, 아버지도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했을 게 아닌가. 천재는 유전이니까.


나는 평소에 비해 숙제를 충실히 했고 어둡기 전에 집으로 들어왔으며 모든 식구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쟤가 요즈음 웬일이야"라는 찬사가 우리 집 지붕을 뚫고 하늘에 이르렀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이 원리는 라디오에서 배운 것임)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이 될 즈음. 아버지와 독대할 기회를 맞았다. 식구들과 함께 밤에 읍내 성당에 갔다가 (이런 일은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술집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오라는 어머니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이런 일은 평생 한번뿐이었다).

포연처럼 연기가 자욱하나 대포(大砲)는 없는 대포(大匏)집에 가 보니 아버지는 친구 분들과 함께 가운데 연탄을 넣을 수 있게 만든 동그란 식탁을 둘러싸고 박격포와 자주포와 곡사포의 차이점, 잦은 정전과 월남전, 지역 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의 공과에 대해 엄숙하면서도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연기로 눈물을 쏟으며 한동안 서 있다가 "아부지요, 어머니가 약주 조금만 더 드시고 빨리 오시랍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 분이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의젓한가!" 라며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열광적으로 칭찬을 하더니 내게 칭찬을 하더니 내게 친구처럼 술잔까지 내밀었다. 아이라도 어른이 주는 술은 마셔도 괜찮으며 어른 앞에서 술을 배워야 한다면서.


나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그 잔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미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조금씩 훔쳐 먹은 술에 중독이 될 지경인지라 새삼 술에 대해 배울 것도 없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친구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 분들은 가까운 데에 살았지만 우리 집은 10리에서 조금 모자라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겨울인데다 밤길이었던 고로 쉬운 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휘파람으로 애마를 불러, 술집 바깥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에 타고 나를 뒷자리에 앉게 하셨다. 그리곤 휘파람을 불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에 기대야 했다. 그 등은 알맞게 따뜻했고 어느 때보다 넓고 관대하게 느껴졌다.

인적이 드문 신작로에 들어선 뒤 나는 조심스럽게 "아부지!"하고 불렀다.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아버지는 그날 마신 술로 기분이 좋았다.

"싸나이? 어디 한번 해 보니라."

"저 학교에 안 가면 안 되겠습니까? 배울 것도 없는 것 같고 애들도 너무 유치해서 사귈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연과 라디오를 스승 삼고 주경야독으로 제 수준에 맞는 진학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이 씨익씨익, 하고 페달만 밟으셨다. 나는 얼씨구, 내 말이 먹혀드는구나 싶어 주마가편 격으로 말을 쏟아 냈다.

"실은 제 정신 수준은 보통 사람의 서른 살에 도달했다고 판단한지 어언 2개월이 넘었습니다. 어쩌면 대학도 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싼 학비를 안 대주셔도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우고 거의 표준말에 가까운 억양과 어휘로 말했다. "고맙다. 내 걱정까지 해 주다니.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아라. 시간을 줄 테니."

그러고는 달빛 비치는 서산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는 신작로 아래 냇가로 내려갔다. 나는 아버지가 오줌을 누러 가시나 보다, 생각하고는 자전거 위에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오시지 않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자전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 내리다가는 자전거와 함께 신작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앉았던 안장을 움켜쥐고 내가 하느님을 서너 번은 족히 불렀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올라왔다.

"달밤에 신작로 위에서 자전거 타고 혼자 있으니까 세상이 다 니 아래로 보이더냐?"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면서 말씀하셨다. 그 물음에는 천재인 나도 대답할 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사십대 초입이었다. 나는 내 아이가 내게 그렇게 말해 온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본다. 준비되지 않은 채 몸과 마음만 들뜬 아이를 마음으로 감복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세상의 틀에 우겨 넣으려는 한 내 중년은 아버지의 중년에 비할 수 없이 유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