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풍경

 

                                                                               신순희

 

   어린 시절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쓴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비질을 한다. 들어오라고. 그새 쌍의 복조리가 넘어 던져져 있다. 조리값은 며칠 받으러 온다. 첫날부터 바쁘면 내내 일하게 된다. 복잡한 웬만한 일은 섣달그믐에 마치는 좋다. 몸도 깨끗이 해야 한다. 목욕탕은 묵은 때를 밀려는 사람들로 초만원이다. 그곳에서 친구들도 만난다. 새해는 단정하게 맞아야 한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단장하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세배한다. 아버지는 벌써 마고자까지 차려입었다. 어머니는 일하다 말고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는다. 엄마도 한복 입어야지. 아이고, 됐다. 우리의 등쌀에 한복을 입는다. 합동 절을 하면 된다. 자식부터 사람씩, 아버지에게 절하고 다시 일어서서 어머니에게 절한다. 아버지는 빳빳한 지폐를 준비해 두었다가 하나씩 건네준다. 절하고 반드시 일어섰다 앉아야 한다. 그냥 털썩 주저앉는 아니다. 절하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다. 어른이 먼저 덕담을 던지면 대답만 하면 된다. 어디 어른에게 오래오래 사세요, 라고 말하나. 그건 아니다. 어머니 잔소리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한복은 두루마기까지 챙겨입는 제대로 갖추는 것이다. 치맛자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려야 양반이다. 저고리 옷고름을 매고 나서 늘어지는 끈의 길이는 같아야 한다. 한복 입기는 정말 어렵다. 동생은 색동저고리, 노란 호박단 저고리. 너무 어른스럽잖아. 추우니까 배자를 걸쳐야 . 한복 조끼, 배자는 속에 하얀 토끼털이 들어있어 포근하다. 동생 둘과 내가 배자를 입고 앞머리를 내린 단발머리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흑백 사진 눈망울만 초롱초롱하다.
  

얼른얼른 준비해. 아침은 큰댁에서 먹는다. 큰댁에 가는 즐겁다. 큰댁은 서울대 문리대학 뒤에 있는 동숭동, 그림 같은 한옥이다. 가는 길에 건너는 돌다리는 덕수궁에서 것같이 돌조각이 새겨져 있다. 큰아버지는 부자다. 할아버지 할머니 차례를 지낸다. 오빠와 아버지, 남자들은 마루에서 절하고 여자들은 마루 아래 시멘트 마당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절한다. 아이, 추워. 여자 없으면 부엌일을 누가 한다고 이렇게 푸대접인지 없다. 여자는 새해부터 남의 집에 전화하면 된다. 새해부터 여자가 남의 집에 먼저 들어가면 된다. 여자가 어쨌다고 그러는 건지.
  

차례상에 과일보다 맘을 끄는것은 옥춘이다. 꽃분홍색에 하얀 줄이 쳐진 동글납작한 사탕이다. 박하사탕같이 약간 물렁거린다. 몰래 하나 집어먹고는 시침 뗀다. 차례가 끝난 상에 올랐던 음식으로 아침을 먹는다. 수정과까지 마시고 나니, 큰오빠는 우리에게 노래를 시킨다. 나는 사랑아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부른다. 부르면서 늙은 아비 혼자 두고라는 가사에 스스로 슬퍼진다.  하긴, 초등학생이 부르기엔 우울하다.
  

큰댁은 텔레비전도 있다. 패티김이라는 가수가 미국사람처럼 가슴이 깊게 파진 드레스를 입고 나와  이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한다. ‘미스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가진 활기찬 이금희,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최희준……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수가 없다. 우리 집에도 이런 텔레비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제라는데, 어디서 사는 건가 궁금하다. 큰아버지는 오직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부자다. 우리 집은 남매. 흥부와 놀부 생각이 난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놀부는 아니다. 우리에게 세뱃돈을 주었으니. 동생들과 서로 얼마 벌었나 돈을 세어보느라 복주머니 안을 들여다본다.
  

시집가서
  
설날 전날, 시댁엘 간다. 가자마자 시어머니 눈치 보며 부엌에 들어간다. 이미 형님이 있다. 늦은 같아 송구하다. 일이 서투르니 선뜻 나서지 못하고 얼른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채소 다듬기 다음으로 만만한 일은 부치기다. 종일 있느라 허리가 결린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는 보고야 잠을 있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도 어머니는 벌써 바쁘다. 서둘러라. 부엌은 야단법석인데 남자들은 느긋하다. 텔레비전에선 한복을 곱게 입은 연예인들이 나와 명랑하게 인사한다. 텔레비전을 보며 시아주버니는 밤을 친다. 남편은 과일의 꼭대기 부분을 둥글게 한두 깎아낸다. 시아버지는 차례상을 차린다. 붉은 과일은 오른쪽 과일은 왼쪽-홍동백서, 생선은 오른쪽 육류는 왼쪽-어동육서. 아이들은 거추장스러운 한복을 들어 올리며 신나게 방안을 뛰어다닌다. 차례가 끝나고 점심까지 먹고 치워야 한숨 있다.
  

저녁은 친정 가서 먹는다. 엄마! 우리 왔어요. 반갑게 맞는 친정어머니. 각자 시댁 일을 끝낸 딸들이 모인다. 느끼한 차례 음식 먹었으니 매운탕을 끓였다, 어머니가 말한다. 실컷 배를 채우고 다리 뻗는다. 늦은 저녁 담요를 깔고 사위들은 화투판을 벌인다. 딸들의 수다는 끝이 없다. 어머니는 곁에서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시애틀에서
  
새해가 밝았다. 고요하다. 양력설이냐 음력설이냐 여러 왔다 갔다 하다 지금은 음력 1 1일이 설날이라지만, 시애틀에 사는 우리는 양력이 설날이라 생각하며 지낸다. 아침에 떡국을 끓여 먹는다. 서운하다고 어제 만두를 빚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떡만둣국이다.

아이들에게 세배를 다시 상기시킨다. 절은 이렇게 하는 거다. 절하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어머니 잔소리 들은 대로 자식에게도 한다. 한복을 입지 않고 하는 절은 이상하다. 품위가 없달까. 주변에 어른이 없으니 세배하러 데도 없다. 심심하네 볼링이나 치러갈까. 달랑 우리 식구 넷이다. 설날 아침부터 날이 쨍하니 좋다. 해피 이어. 아니, 새해 많이 받으세요!

 

[201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