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남는 건 부부뿐인데...
최 숙 희
학교와 직장으로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연말연시가 되면 우리 부부는 기대와 설렘으로 분주해진다. 애들이 가려고나 할까 하면서 신문의 여행사 광고를 기웃거리고, 어디 가서 뭐 먹을까 하며 맛집 검색을 한다. 그래도 집 밥을 먹여야지 하며 식단을 짜고 식료품을 사서 나르니 냉장고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각종 성인병에 몸을 사리느라 생선과 푸성귀위주로 살다가 갈비찜을 하고 전유어와 빈대떡을 부치니 부엌은 오랜만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겨우 열흘 남짓인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짧은 여행, 등산, 미술관, 영화관, 외식 등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계획을 짠다. 그러나 집에 오는 날까지 기말고사가 있어 며칠 밤을 잘 못 잤다는 아들과 항공료를 아끼려 밤비행기를 타서 새벽에 도착한 딸은 일단 자고 싶단다. 물가 비싼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의 빠듯한 형편을 감안해서 아무것도 사 오지 말랬더니, 헐 진짜 빈손으로 왔다. 달기만 하고 값만 비싼 유명 제과점의 과자와 초콜릿을 몇 년간 계속 사오기에 한 소리였는데, 서운했다. 어머니날이라고 보내는 꽃다발에는 아무 소리 말아야겠다.
남편은 하루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아이들 도착 첫날부터 영화를 보자 했다. 공통으로 안본 영화를 찾다보니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다. 고단한 아이들은 꾸벅꾸벅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고 영어가 안 들리는 우리도 지루하니 눈꺼풀이 무겁다. 깜박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온 식구가 다 자고 있는 진풍경이다.
이민초기 자리 잡느라 아이들 어릴 때 시간을 같이 못한 것이 아쉬워 이제 시간을 같이하려 하지만 성인이 된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대여섯 시간씩 비행기 타고 집에 왔으니 어디 멀리 가는 것은 싫다하고 가족보다 친구가 소중한 나이라 우리에게는 자투리 시간만 배당될 뿐이다. 5년 자취생활의 내공인지 딸은 음식을 잘 한다. 레시피를 정확히 따르니 맛도 모양도 훌륭하다. ‘가까이 살면서 맛있는 것도 자주 해먹으면 얼마나 좋아’ 하며 직장을 LA로 옮길 수 없냐고 물으니 잔소리꾼 엄마랑은 같이 살기 싫다고 한다. ‘같은 집에서 매일 얼굴 맞대고 사는 것은 나도 사양이야. 네가 흘리고 다니는 머리카락 줍느라 허리 아파.’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엄마, 아빠의 역할에 몰두하여 아이들을 키우는 파트너로만 살다가 아이들이 떠나니 적막감과 상실감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날이 그날처럼 재미없다.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고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자식바라기로 살 것인가. 오래도록 서로 아끼고 위하며 지켜줄 사람은 배우자밖에 없는데 부부끼리 재미있게 사는 법을 궁리해 보련다. 같이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취미와 봉사활동으로 홀가분하게 인생 2막을 시작하며 삶에 활기를 불어 넣어야겠다. 그러나 남편은 건강염려증으로 먹는 것을 사사건건 간섭하고 저녁식사 후 소파에 앉아 TV라도 보려면 설거지 자기가 할 테니 얼른 운동 다녀오라고 재우친다. 3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포기 못하고 자기 의사대로 나를 고치려 하는 남편, 나를 위한 잔소리인 줄 알지만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니 다음 레퍼토리를 외울 정도이고 지겹다. 다음 단계로의 이동은 항상 어렵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8/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