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거도사(山居道士)
김석연
산 자락에 작은 방가로를 마련하고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무지무지 행복하다. 대통령을 준대도 사양하겠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살 집을 구하다 보니 밀리고 밀려서 이 변두리 산자락, 그야말로 달 동네 싸구려를 하나 장만했다.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산 동네 산다고 추켜세운다. 그래, 이건 나의 별장이다. 없는 자의 서러움에 이 방가로를 무릉도원으로 둔갑 시켰다. 산거도(山居圖) 속의 초가집에 청빈낙도하는 신세인양 위장하고 있다. 착각 중에도 아주 중증인 불치병이 든 것이다. 일종의 정신 착란 증세인 퇴행성 신경 경변인 것이다.
사람 사는 게 다 제 잘난 맛에 산 다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 아닌가. 잘나지도 못했으면서 잘난 체 해봐야 꼴불견인데. 그러나 어쩌랴 꼴불견이면 어떻고 못났으면 어쩌랴 그래도 좋은 걸. 쥐뿔도 없으면서 별장 타령을 하니 그 허영이 위로가 되고 살 맛이 난다
애연가들은 구름 과자만 먹고 배 고픈 줄을 모른 다더니 나는 뜬 구름에 앉아 이슬만 먹고 이빨을 쑤시는 격이니 퇴행성 신경 경변임에 틀림 없다.
오막살이, 이는 가난의 상징이지만 이 오막살이가 내겐 무릉도원이요 산수화다. 양지 바른 산 자락에 뒷동산은 나를 감싸주고, 확 트인 전망은 꽉 막힌 숨통을 확 풀어 주고, 오후의 따스한 햇살은 모든 걸 녹여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몫이라는 데 내가 쇠푼이나 있었다면 이런 청빈낙도는 내 몫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 집을 장만했다는 기쁨으로 정원을 가꾼다. 과수원집을 만들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거금을 들여 과일 나무를 심었다.
봄이 되어 새 싹이 돋고 꽃을 피운다. 싱싱한 과일 먹을 생각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사슴 떼가 내려와 작살을 냈다. 울화가 치민다.
그러나 앞뜰에 사슴 떼가 노닌다니 어느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무릉도원이 아닌가. 그래 바로 요거다. 사람들이 오면 우리 집엔 에덴 동산처럼 사슴 떼 들이 거닌다고 자랑을 한다. 다들 부러워 한다. 이를 통해 나의 불행을 행복으로 삼으니 얍삽한 인간이 된다. 쥐구멍에 햇빛 든 착각에 빠진다.
소동파 선생이 젊었을 때 한간의 목마 도를 보니 진짜 말 같이 보여 감동했었는데 출세 후에 그 목마도를 보니 말 보다는 말 등에 놓인 금빛 안장이 먼저 눈에 뜨이더란다. 미주고반(美酎膏飯)엔 금빛 안장만 보이지만 이 청빈 낙도엔 자연의 한 올로서도 행복이 넘친다.
이 산 자락엔 명예도 권세도 없지만 흰 구름이 머물다 바람 타고 떠나는 낭만이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 아주 조금만 가졌어도 무지무지 행복하다.
시원한 골 바람이 스쳐간다. 풋풋한 풀 향기가 그윽하다. 모자라지만 한가하니 넉넉하고 흐뭇하다. 달빛에 고요와 평화가 묻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