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모자

 

 지금으로 부터 34년 전이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간 1981년 5월 29일은 어릴때 그토록 그리던 비행기에 탑승한 날이다. 신혼 7개월간의 단 꿈을 깨고, 두 동생을 데리고 어쩔 수 없는 길이라 주어진 이민의 길에 오른것이다. 호기심과 기대에 차있던  미국행은 생소하고 낯설어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대한 항공 기내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는 나의 가슴을 아리며 눈물을 쏟게 했다. 27년간 내가 어느 나라에서 살아왔는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온 터라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었다는 새로운 인식과 함께 몰려오는 애국심과 감성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국에 간다는 일이 설렘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더 앞섰는지도 모른다. 기내에 오를땐 웬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배웅하러 온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올라탄 이유도 있었던가 보다.   

 

 그때 처음 타 보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쓰고 있던 챙 달린 노란색 모자를 벗어서 만지작 거리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엘에이 공황에 도착하면 서로 안면도 없는 분이 우리를 알아보라는 증표의 이 노란색 모자를 바로 찾을까. 혹 같은 색 모자를 쓴 분이 또 있다면...... 하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 보기도 했다.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릴때는 공중이나 바다에 떨어져 이대로 가면 영영 가족들을 볼 수 없게 되는것은 아닐까 하는 잡념들이 순간순간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무사히 LAX 에 도착하였다. 출구쪽으로 나가보니 목을 빼고 노란 모자를 찾으며 기다리셨다는 H  교회 사모님과 전도사님이 반겨주셨다. 어둠이 깃들어 늦은 저녁시간에 우리는 벤에 올라타 무조건 그 분들을 믿고 따라 나섰다.

 

 하룻밤을 목사님 댁에서 자고 이튿날 목사님의 인도로 한인 타운에 방을 얻었다. 미국생활의 빠른 적응을 위해 남동생은 운전을 배우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살림을 위해 주위에 마켓과 은행등 버스타는 길을 익히고, 이웃과도 사귀며 묻고 미국생활을 익히려고 애썼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그림같이 멋있는 미국의 풍경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밋밋하고 건조하여 메마른 아스팔트와 운치없는 LA 거리 뿐인것은 내 마음이 여유가 없던 탓이리라.

 

 난 7일째 되는 날에 교인이 안내한 일본 양로 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 같으신 그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로 민생고 해결책에 들어선 것이다. 함께 차를 타고 갈 직장인이 없을 땐 혼자서 버스를 두 세번 갈아 타며 일을 다녀야 할 때도 있었다.주일엔 교회에 가서 열심히 봉사를 했다. 그때 교회에서 먹던 한국 음식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전혀 느껴보지 못한 꿀맛이었고 어머니의 손맛같아 푸근하고 정겨웠다. 교회에 가서 사모님을 뵈면 나를 처음 만날때 썻던 그 '노란색 모자'는 생각만해도 웃음이 나온다고 여러차례 말씀하셨다. 내겐 아주 중요한 발상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얼마나 촌스럽고 웃기는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다보니 한 달 만에 가져온 돈은 바닥이 났다. 내 딴에는 달러를 한화로 계산부터 하게 되어 뭐든지 물가가 비싼것 같아 1달러도 절약해서 살림을 했다. 그러나 매달 날아오는 전기세, 자동차비, 전화요금 등 방세를 내야 할때는 부담 정도가 아니라 내 뼈를 깎아내는 듯 한 고통으로 아려왔다. 게다가 남편과 함께 고국에서 신혼으로 살때와 거두어야 할 두 동생들과 함께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차이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들게만 여겨졌다.  왜 좋은 교사의 직을 버리고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 와서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다시 가방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수차례씩 내 머리속을 휘저었다. 결국 방세를 줄이기 위해 원 베드룸으로 옮겼다. 한국과의 통화료도 줄이기 위해 편지나 엽서를 사용하며 그립고 고달픈 마음을 달랬고, 동생들과 예배를 드리며 극복하는 힘을 얻었다.

 

 그렇게 뼈저리고 철저한 고생을 통해 경제관념이 바뀌고 이민의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남동생은 좁은 옷장에 불을켜고 틀어박혀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공부에만 전념하더니 10년이 지난후 뉴욕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한국에 나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가정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여동생은 이곳에서 결혼하여 두 딸을 낳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 나는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들어온 후 부터는 안정을 찾고 직장인으로 긍지를 갖고 살고 있다.   

 

 나의 큰 오빠가 처음 미국 유학으로 겪던 탐험가의 길을 왜 동생들에게 멀리 선물처럼 이민의 길을 걷게 했는지 뒤 늦게야 깊은 깨달음과 감사로 받아들여진다. 난 한국이라는 온실안에서 콩나물처럼 자랐던 여린 소녀 같았다. 미국 이민이라는 미지의 배를 탄 후 정신적 경제적 자립에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아내이자 엄마로 그리고 사회인으로 이제야 성숙한 여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아직도 언어의 장벽은 남아 있지만 그런대로 다민족속의 한국을 느끼며 코리안 어메리칸으로서 낙관하고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더듬듯 처음 미국에 온 때를 회상해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이 드라마 같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존재감에 그져 감사할 뿐이다. 벌레 먹은 잎사귀도 별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보는 시인처럼 '노란모자'는 나의 이민 초기를 회상케 하는 재미있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과 주름진  손등은 다양한 추억으로 얽힌 이민생활의 이야기책으로 본다면 무리가 될까. 



                                      <재미수필 17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