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기슭에
박유니스
“오늘은 혈색이 아주 좋아 보이네.”
약속이나 한 듯이 떠들썩하게 과장된 몸짓으로 우리들은 너의 병에 대한 염려를 감추었어. 초가을의 햇살이 네 병실에 고즈넉히 가라앉아 있었지. 훤칠한 키의 너의 아들이 일찍 퇴근했다며 문을 열고 들어섰어.
시디플레이어와 랩탑을 갖다 드리겠다고 하자, 너는 퇴원 할 때 짐 되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하더구나. 하루도 홈피에서 우리와의 수다를 거른 적이 없는 너였는데. . .게다가 함께 문병 간 S는 너의 남편과 병실 복도에서 긴 대화를 나누는 눈치였어. 그제서야 나는 이것이 너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어. 너의 이 땅에서의 날들은 그렇게 조금밖에 남지 않았었고, 가을이 깊어진 11월 중순에 너의 부음이 전해졌지.
그립고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친구 J, 너는 졸업 후에 유학을 다녀와서 남도의 C읍으로 내려갔어. 그곳 학교 재단의 이사장이신 부모님 곁에서, 남동생이 교장으로 있는 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지. 너의 그런 선택과, 지방 소읍의 교육 사업에 평생을 올인하는 너의 집안 이야기는 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고, 자랑과 존경의 대상이었지. 또 너는 거의 매해 여름방학 석 달을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Good News 본부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봉사를 하며 전 세계 곳곳의 미전도 지역에 저렴한 비용으로 복음을 보급하는 일에 너의 시간과 열정을 쏟았었지.
해가 바뀌어 봄이 되자 우리들의 사이트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것 기억나니? 그 전 해 가을에 너와 같은 과 동기인 K가 서울생활을 접고, 네가 있는 C읍으로 낙향을 감행한 때문이었지. 우리는 새로 지은 K의 전원주택과, 학교 앞 머위밭머리에 있는 작지만 고풍스런 너의 사택을 재방문하고, 철쭉꽃 군락지로 유명한 C 읍의 황매산을 그 만개시기에 맞추어 등반하는 계획들을 세우며 무척 들떴었지.
너와 K는 철쭉꽃의 현재 상태와 그 만개 예상 시기, 황매산 구석구석의 골짜기들과, 어느 지점까지 차로 올라간 후에 도보로 등산을 시작해야 가장 아름다운 철쭉꽃을 감상할 수 있을까, 등을 거의 매일이다시피 우리 사이트에 분석 보고했지. 너는 이일에 K보다 배나 열심이었어. 하지만 그 해 따라 봄은 더디 오고 철쭉은 늦도록 봉오리를 열지 않았어.
C 읍으로의 여행 일정에 맞추어 서울행 비행기표를 예약하려던 나는, 이렇듯 C읍 행이 자꾸 늦춰지자 조급증이 났어. 여러 명의 친구들이 함께 시간을 내어야 하는 여행일자를 반드시 철쭉의 만개 시에 맞춰야만 할까. 만개든 반개든 꽃은 다 예쁜데. . . 철쭉의 군락지면 어떻고 산락지(散絡地)면 또 어떤가? <하여가> 한수를 너에게 보냈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황매산 철쭉꽃이 회색인들 어떠하리
우리는 한데 얼크러져서 희희낙락 하리라.
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대접하고, 꽃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택하느라, 수도 없이 황매산을 오르내린 너. 그때 벌써 너의 몸속에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지 않았을까. 그 해, 우리의 여행은 끝내 황매산 철쭉의 만개시기를 못 맞추었어. 행복의 절정을 눈앞에 두고 삶의 무대를 떠나야 했던 너의 앞날에 대한 예고처럼. . .
하늘이 너를 부른 날, 난 먼 이국에서 홀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어. 언제나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키우고 삶을 사랑하고 재기가 반짝이던 친구. 너의 마지막 가는 길에 가까이 있지 못함이 안타까워서, 천국 문에 도착하고 있을 네게, 그룹 아바의 “Arrival” 을 띄워 보내며, 서너 줄의 짧은 글로 이 땅에서 너와의 교유에 작별을 고했었지.
가을의 품에 안겨
한 장 낙엽으로 누운 친구야
새봄에 사방에서 움트는 소리 들리거든
황매산 기슭에 한 송이 철쭉으로 피어나라
< 재미수필 1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