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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김석연
벌써 수 십년 전 일인데 지금도 이 표절이라는 글자를 보거나 듣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 진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국어 선생님이 교지를 만들어야 하니까 누구나 글을 한 편씩 써 내야만 점수를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국어 점수를 따려면 시던, 수필이던, 기행문이던, 생활수기던 간에 뭔가 한편을 써내야 되겠는데 당시 내 실력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거개의 학생들이 글쓰기에는 수준 미달이었다.
6. 25전쟁 통에 폭격 맞아 날아간 건물 빈터에, 미군들이 구호물자로 세워준 천막 임시 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게다가 시골의 농업학교였으니 학생들 실력이 오죽했겠나. 공부하러 오는 것인 지 그냥 재미 삼아 다니는 것인 지 학교라는 주체가 불 분명하던 때였다.
요즈음 학생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학교 생활이었다. 공부보다는 목총 메고 군사훈련 해야하고 곡괭이 삽들고 방공호 파기 일쑤였고 똥지게 지고 밭농사 지어야 하고 돼지우리 청소하랴 닭장 청소하랴 책하고는 영 거리가 먼 학교 생활이었다. 공부는 뒷전이고 미군부대 주변을 맴돌면서 껌조각 하나 구걸하기 바빳고 깡통 조각을 주어다가 재털이라도 만들어야 살림에 보탬이 될때이다.
신문이 있나 잡지가 있나 대도시에는 있었겠지만 시골인 이천읍에는 책방 조차도 없을 때였다. 문학은 고사하고 글이라는걸 도대체 구경 하지 못할 때이니 시가 뭔지 소설이 뭔지 나하고는 상관 없는 남의 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한 편 써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밥맛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인쇄된 헌 종이장을 들추다 보다 썩 마음에 드는 편지가 눈에 띄었다. 옳치 요거로구나 하고 그대로 베껴 시치미를 딱 떼고 제출했다. 한 건 했다 싶어 한숨 돌리고 있는데 아불싸 그 표절 글이 장원을 한게 아닌가. 그래서 문학 소년이 된것이다.
표절을 했다는 부끄러움 보다 더 큰 마음의 부담이 가슴을 눌렀다. 교내에서 일약 유명하게 되고 문학 소년으로서 대접을 받게 되니 그게 내 실력이 아니고 표절한 것이요 하고 떠벌릴 수도 없고 억지로 글쟁이 노릇을 할려니 속이 타들어 갔다.
업친데 덮친다고 이젠 교지 편집까지 맡으란다. 그러니 내 실력이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 참담 했겠나. 책하고 거리가 멀던 나는 뛰어 놀지도 못하고 책하고 맞붙어야 했다. 내가 쓴 글이 표절했던 것만 못하면금방 탄로가 날 것이고. 해서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도 억지로 문학소년인 것처럼 떠벌이니 점점 인기가 충천했다. 표절 위에 인기까지, 나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다. 인기 배우들이 자살하는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그때의 내 심정이 그랬으니까.
죄 짓고는 못살아. 죄 지은자의 악몽이 얼마나 가혹한가. 표절한 죄 때문에 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를테면 개천에서 용난격이라. 지금 내가 문인 행세를 하는 것도 그때 그 표절 사건 때문에 그 표절한 흑심을 감추려고 노력한 덕분이 아니겠는가. 표절했기 때문에 문인이 됐다 이렇게 말하면 어불 성설이겠지만 표절한 죄가 사람을 만든 건 분명하다.
표절한 문인인 것, 수 십년을 감춰온 내 허물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털어 놓는다. 표절을 했으면서 무슨 똥배장이냐고 나무랄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철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시비걸 사람이 없을 것 같아 털어 놓으니 너그러히 봐주길 바랄뿐이다. 지상에 크게 발표한 것도 아니고 자그마한 교지에 실린 것이니 예쁘게 봐주길 바란다.
가끔 지상에 누가 누구 것을 표절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내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입맛이 씁쓸하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표절로 인해 마음 고생했을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것은 너 나 없이 욕심이 지나치기에, 내 실력보다 더 잘보이고 싶은 지나친 욕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결과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리라.
나는 비록 표절로 인해 진정한 문인이 되었지만 표절로 인해 얼마나 큰 마음 고생을 치렀는지를 깨닫게 될 때 부족하나마 이제 내가 온정성을 기울여 쓴 글이 진정 나의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표절이여 안녕.
< 재미수필 11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