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 작가 이미경]의 구멍가게 오후 3

오후 3시는 여백의 시간. '구멍가게 오후 3'를 새로 시작한다. 액정 화면에서는 누리기 힘든 차 한 잔의 여유. 찻집 주인은 서양화가 이미경(48)씨다. 20년째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펜으로 섬세한 온기를 담아냈고, 작년에는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남해의봄날)'2017 조선일보 올해의 저자 10'으로 꼽혔다. 여전히 영업 중인 곳도 이제는 흔적만 남은 곳도 있지만,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제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빛의 스피드가 아니라, 멈출 때 멈출 줄 아는 삶의 정지 신호가 아닐까. 소박하고 따스한 구멍가게 예찬기다

목계나루와 앙성을 지나 충북 제천, 백운으로 가는 길에 산척면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이곳을 지나다 분홍의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는 집 앞에 발길을 멈췄습니다. 동네 어르신이 알려 주신 백 년 된 살구나무 앞. 마당 한편 플라스틱 의자와 음료 박스, 유리창에 남은 우표와 담배 문구는 이곳이 예전에 구멍가게였음을 알려줍니다. 매섭게 차가운 날, 이른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차곡차곡 쌓여 시야를 온통 백색으로 덮었습니다. 떠돌던 뿌연 입자마저도 눈과 함께 사뿐히 내려앉아, 더없이 투명해진 하늘은 눈부시게 시리고도 청량합니다. 깊이 들이마신 찬 공기에 머릿속까지 맑아집니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뿌드득 헤치고 다시 찾아간 산척의 겨울은 하얗게 나를 반깁니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결에 흩날리는 반짝임 사이, 기억은 하늘 저편 너머로 날아오르고 오래된 가게 안에 불이 켜집니다. 연통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는 꼬리를 한껏 말아 올렸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왈왈, 정겨운 소음이 더해집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가게 안에는 눈가 주름이 깊게 파인 할아버지가 주름진 미소로 의자를 건넵니다. 다가가 앉은 난로 위 주전자에는 따스함이 끓어오르고 군고구마의 달큰함이 정겹습니다. 나만을 위해 그곳에 자리한 듯 작은 불빛은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한, 너른 곁을 내주었습니다. 정겨운 그곳에 다다르는 즐거운 상상으로 무술년 새해 한아름 소망을 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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