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의 또 다른 추억 / 신혜원
지난 시월 초, 시카고 행 외출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싸우스 웨스트 비행기와 하이아트 호텔을 모두 무료로 이용했다. 직접 돈은 지급하지 않았지만 신용 혜택을 받은 것이니까 결국은 아들이 지급한 대가인데도 공짜 같은 기분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했다.
시카고를 첫 번 방문한 것은 14년 전 친구 H의 큰아들 결혼식이 있던 때였다. 3월 중순이었던가, 밤을 비행기에서 보내고 당일로 다녀왔는데 엘에이에서는 볼 수 없는 함박눈을 맞아서 매우 흥분했었다. 그 짧았던 방문길이 내 마음에 오래 기억으로 남았다.
이번 여행은 2박 3일 동안 일과 집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특별한 휴가였다. 바쁜 중에 먼 길을 달려와 변함없이 반겨주고 대접해준 친구 부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시카고의 밤거리를 거닐며 엘에이보다 훨씬 안전하게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
다음 날엔 남편의 쪽 지인이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우리는 이층버스(Big bus)를 타고 시카고 시내를 2시간 동안 구경했다. 친구의 말대로 시카고 도시의 건축양식은 특이하고 단단해 보였다. 건물 하나하나가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이 새로웠다. 어떤 것은 마치 성냥갑을 쌓아 올린 모형 같고, 레고 장난감으로 빚어낸 조각처럼 빌딩의 숲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외국에서도 건축양식과 예술성을 견학하고자 몰려온 실습생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최근 신혼여행지로도 시카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도시 밖으로는 미시간 호수가 강이나 바다처럼 넓게 자리를 잡았고, 안으로는 빽빽하고 높은 빌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큰 글자로 ‘트럼프‘(TRUMP)라고 영어로 표기된 건물과 그 옆에 있는 옥수수 빌딩이었다. 옥수수 알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진 모양 속에 차들이 주차된 빌딩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구경하는 동안 비바람도 맞고 버스에서 제공하는 우비를 입은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관광 안내를 듣다가 너무 추워서 버스의 아래층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두 시간 후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길에서 기도하는 걸인이 눈에 띄었다. 엘에이에 살면서 수없이 보아온 노숙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좀 특이한 모습에 유심히 보게 되었다. 조그만 통을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구걸하기가 미안해서일까 염치가 없어서 고개를 못 드는 것일까? 그 모습이 그저 측은하고 겸손해 보이기까지 해서 빈 통 안에 1달러 지폐를 넣어주고는 나도 모르게 그 걸인의 등을 톡톡 두들겨 주었다. ’God bless you!’라고 속삭이며. 어느새 행인들이 나를 더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엘에이 걸인들에게는 왜 동정을 베풀 여유가 그렇게 없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날은 아들이 전화로 안내해준 대로 지도를 보고 걸어서 밀리리움 공원에 도착했다. 아주 커다란 콩 모양을 한 거울같이 비치는 곳 (bean of sea) 은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몰려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무도 특이하고 신기해서 애들처럼 두 팔을 벌리고 감격의 자세를 취했다. 또 그 주위를 걷다가 박물관이 있어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별난 드럼 보이를 보게 되었다. 커다란 양동이 하나를 엎어서 다리 사이에 끼고 둥글고 가는 막대기 두 개로 ‘쿵작쿵작 쿵 자작 작작’ 하며 두들기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얼굴에 아주 야윈 아프리카인으로 보이는 그는 운치 있게 예술 감각과 속도까지 조절해가며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었다. 때론 그가 머리를 양옆으로 돌려가며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이는지 지나가는 인파들의 눈길과 귀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박물관에서 두 시간을 관람하고 나왔는데 그는 여전히 드럼을 치듯, 때론 쉬어가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며 앞에 놓인 또 하나의 큰 양동이를 보니 1달러짜리가 거의 삼분의 일을 채우고 있었다. 종일 그렇게 하면 일당은 충분히 벌고도 남을 것으로 보였다. 왜 이런 색다른 걸인들이 자꾸 내 눈을 끄는 것일까?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 엘에이에서 흔히 보는 걸인과 자꾸 비교되는 것이다.
그곳을 빠져나와 걷다가 보니 강이 나왔다. 도시 속의 호수라기보다는 관람용 배가 다니는 작은 바다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못 맞추어 배를 탈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비행기 탈 시간까지는 두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호텔 체크아웃을 한 다음, 짐을 잠시 맡겨놓고 우리는 또 걸었다. 다리가 아파서 유유히 지나가는 마차라도 타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시간 호수가 보이는 시카고 도시 주변을 걷다 보니 작은 공원이 보였다. 그곳엔 긴 의자가 있어 난 창피를 무릅쓰고 벌렁 누워 재킷으로 얼굴을 가렸다. 쉽게 아파지는 두 다리를 남편의 무릎에 올리고 푹 쉴 셈이었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하늘은 먹구름으로 흐려지고 인근 빌딩은 주택용 아파트로 보였다. 갑자기 그곳에 우리가 살 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나 말고 다른 인종의 한 남성도 긴 의자에 혼자 누워 있었다. 나도 그도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그렇다. 집 떠나면 누구나 잠시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창피한지 어서 일어나 가자고 한다. 일어나서 호숫가를 도는데 저쪽에서 집이 없어 보이는 노인 여자가 보따리와 보따리를 깔끔하게 싸고 묶어서 서서히 홀로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엘에이의 노숙인들보다는 단정해 보였다. 내 눈엔 왜 또 그런 분이 보이는 것일까.
나는 예약해둔 셔틀버스가 올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호텔 앞으로 걸어갔다. 맡겨둔 짐을 찾고 나니 곧 버스가 도착했다. 차를 타고 미드웨이 공항으로 가는 중 비바람은 아주 세차게 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친구에게 고마웠다고 카톡을 보냈다. 소나기는 바람과 함께 차창을 더욱 세게 두드렸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전부터 그렇게 비바람이 몰아쳤다면 마지막 날은 꼼짝없이 외출도 못 하고 어느 빌딩 안에 갇혀 있었을 텐데. 실컷 구경하고, 사진 찍고 돌아다닌 후 창밖의 소나기 구경까지 하니 너무나도 시원하고 고마웠다.
공항에 도착해서 엘에이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뜻밖의 반가운 지인을 만났다. 남편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창밖엔 어느새 잦아든 비와 함께 쌍무지개가 활짝 피고 있었다. 외출의 마지막 하이라잇 이라도 된 양.
우선 엘에이의 노숙자는 너무 많고, 더럽고,냄새나고, 게으르고.... 너무 흔해서 그런지 뭘 주고 싶은 마음이 안생겼어요. 그리고 바쁜 제 생활이 여유가 없었지요. 그런데 시카고에서는 여행중이어서 그런지 제 마음이 더 포근했나봐요. 그리고 우선 환경이 너무도 차이가 나 보였어요. 걸인도 뻔뻔스럽지 않고, 뭔가 미안해서라도 공짜로 얻으려는 마음이 덜해보여서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것같아요. ㅎㅎㅎ
신혜원 선생님!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노숙자입니다.
그런데
엘에이의 노숙자와 시카고의 노숙자가 왜 다른 느낌으로
선생님께 다가갔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