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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삶의 끝자락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인가 부활인가

절망인가 소망인가 

 

누군가 

만들어 놓은 통로

겸손되이 걷노니 

 

 

  밤도 깊어 한 시 오십 일 분. 8월 16일 수요일이다. 요즘 들어, 잠 자는 시간이 부쩍 늦어지고 있다.

  방금, 한국으로 되돌아 가시는 박덕규 교수님을 공항에  모셔 드리고 왔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으나, 민희씨의 연락을 받고 나갔다. 엊그제 강남에서 만난 수필인의 만남에서 그 분의 면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겸손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격의 없이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이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내적인 열정까지 겸비하고 있는 분으로 보인다. 강의 차, 이 곳을 몇 번 오가며  수필 장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신 분이다. 이민 사회의 특수성을 눈여겨 보신 때문이다. 

  개인의 이민사는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된다. 삶의 기록으로는 작가가 직접 화자가 되는 수필이 가장 친밀한 장르가 된다는 것에 서로 공감한다.

  시는 은유와 생략으로 때로 갈증을 주고, 소설은 주체가 작가가 아닌 작품 속 화자로 독자와 친근미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수필은 민얼굴이요 날 것으로, 보다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소재에 대해 정이 빠지면 첫 줄부터 막히는 게 수필이다. '따뜻한'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것도 수필이지, 시나 소설이 아니다. 수필은 체온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런 수필을 사랑한다. 

 수필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재주나 기법 없이도 쓸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도 우리 생활 속에서 일상화 될 필요가 있다. 수필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누군가의 가교 역할이 필요한 지도 오래다.

  교수님은 고맙게도 그 역할을 일정 부분 맡아 주시겠다고 한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구심점도 멘토도 없는 시점에 우리에게도 큰 힘을 실어주는 말씀이다. 강요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셨지만, 벽돌 한 장의 역할이라도 보태고 싶다.

  오늘 저녁 다시, 짧은 만남이었으나 수필이 가지는 의미 부여를 재확인했다. 개인의 삶을 넘어 무언가 소재의 영역이 넓어지고 주제의 무게도 좀 더하는 느낌이다. 자기 집 앞마당을 쓸어도 지구의 한 귀퉁이를 쓸고 있다는 생각을 하라고 이르시던 여고 시절 교장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개인의 이민사는 한인의 이민 역사가 된다'는 사실. 

기록으로서의 수필 역할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무장 해제하고 소소한 내 신변잡기만 써 온 게 미안해 지기도 한다. 

  아이와 어르신까지 이 땅에 사시는 분들이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건 큰 소득이다. 우리 수필인들도 개인의 문학적 증진만 꾀할 게 아니라, 나눔의 봉사 정신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르치기 보다 함께 쓴다는 겸손된 마음으로 임해야 하리라. 

  지금쯤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힘차게 창공을 날고 있겠지. 전설의 새처럼 날개 퍼득이며 날고 있으리. 그 새는 딱 한 번 땅에 발을 딛는다던가. 마지막 삶의 끝자락에서. 

  마침, 원고 정리를 하고 잘 생각으로 컴퓨터를 여니 화면에 멋진 배경 사진이 뜬다. 마치, 누군가 만들어 놓은 삶의 터널 같다. 긴 회랑처럼 아취로 연결된 끝자락은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작아진다.

  이를 일러, 무한 원점이라 하던가. 삶의 끝자락. 거기에 닿을 때 까지의 우리들 자세를 묵상하게 한다. 분명, 그 끝에는 죽음이 있겠지.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의 끝자락을 붙잡고 허무하게 죽어 가겠지. 하지만, 믿는 이들은 죽음의 끝자락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안고 그 분 품에 안길 테지. 통과 의례처럼 피할 수 없는 삶의 통로. 그 길을 겸손되이 걷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존재의 의미를 붙잡고 살고 싶다. 

  벽돌 한 장의 역할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다. 어느 새, 시계는 새벽 네 시를 넘었다. 조석으로 밤공기가 차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다시금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