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계절
헬레나 배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다가왔다. 흙에서 나서 한 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의 순리를 되새겨보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된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온 나는, 이번 ‘재의 수요일’에도 이마에 재를 받으며 이 동안을 경건하고 은혜롭게 보낼 수 있도록 간구하였다.
매년 성주간이 되면 나는 예수님의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다시 한번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중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붉은 옷을 입고 당나귀를 타고 오는 ‘평화의 왕자(Prince of Peace)’를 맞으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오시는 길목에 깔아 드리고, 야자수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찬미 받으소서!” 목청껏 외치던 성지주일(Palm Sunday)에, 나도 그들과 함께 열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씻어주었다. 그리고 ‘성금요일’,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오후 세 시에 십자가에 매달린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사순절에는 나의 할머니를 생각한다. 그분 세례명이 ‘마리아’였는데 당신의 생애도 성모 마리아처럼 비장한 것이었다. 그 시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치고 누구나 가슴 아픈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없으리라. 나의 할머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복동이 엄마도 새앰 새앰 샘이 나서 샘표 간장 ’~ 샘표 간장 선전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웃으며 장단을 맞추던 할머니의 이름은 바로 ‘박 복동’이었다. 1903년생 범띠 여자, 할머니는 달처럼 환하게 고우신 분이었다. 서울에서 출생해서 진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할 때 영친왕으로부터 금으로 된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모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의 간곡한 유학에로의 권고를 뿌리치고, 교사가 되어 난생처음 경상북도 경산이라는 ‘쌀나무가 자라는’ 지방으로 발령받게 된 것은 무엇을 위한 전주곡이었을까?
할머니는 당신이 가르치던 제자(훗날 나의 고모할머니)의 집이기도 한 그곳 대지주의 저택에서 방 한 칸을 빌려 살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 삼대독자가 훗날 나의 할아버지가 된 분이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방학 때마다 엇갈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침내 서울 친정에 가 있던 ‘그녀’에게 찾아가 ‘프러포즈’를 하였다. 할머니의 친정아버지는 호감 가는 첫인상의 신랑감에게, 흔쾌히 결혼을 승낙하여서 바야흐로 역사는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할머니는 그 후 ‘플레이보이’ 남편 때문에 무던히도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비단옷을 입고 가마를 타고, 다니며 그 시대 최고의 문화생활을 향유하던 마님이었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향락주의에 심취해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아들 셋을 출산하였는데 그 맏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예술적 영혼을 지닌 몽상적인 청년이어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의사 아들’을 두고 싶어 하던 할아버지의 완고한 강요에 따라 의대를 진학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상당한 자기희생이었으리라. 이어서 역시 할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여고를 다니던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녀가 지금 나의 엄마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는 매우 진부할 수도 있지만, 바로 이것이 당신 자신들의 ‘운명’, 그리고 나와 내 형제와 또 우리들 자손의 운명으로 이어지며 카르마를 지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전쟁이 있었고 이제 나의 조부모님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흔아홉 칸짜리 집도,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귀한 유물도, 재산도. 할아버지는 노년에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당시 경북 상주의 적십자 병원에 근무하던 큰아들 집에서 병시중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당신이 임종 전 천주교로 입교하여 젊은 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할머니께 자기의 모든 잘못을 용서받고 아주 독실한 신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땅을 쓰다듬으며 통곡하였다. 엄마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주던, 사랑하는 큰아들을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렸던 할머니에게, 성모 마리아는 유일한 구원의 손길이었고 그때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묵주가 떠날 날이 없었다.
할머니는 매일 하늘거리는 촛불 앞에서 우리 네 남매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아마 막내인 나를 위한 기도를 제일 많이 하였으리라. 금쪽같은 아들을 잃고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거의 백 세까지 곱고 정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힘이 아닐까 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일에만 전념해야 했던 엄마 대신에, 할머니께서 항상 우리 옆에 계셨다. 새벽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오빠들을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도시락밥을 지었다. 손에 물 한 방울을 안 묻히던 마님의 손으로 생전 처음 장도 담아 보았는데 그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만약 내가 오늘날 아이를 낳아 길러보지 않은 여자였다면, 그 애끓는 사랑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우리 네 남매가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온 후, 할머니는 한국에 남아 큰 숙부님 댁에 지내면서 자나 깨나 우리를 향한 그리움을 항공 엽서에 실어 보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작은 숙부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다니다가 우연한 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도중에 그만두고 나온 막내아들이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던 아들이, 근무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하느님을 원망하며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는 그때쯤에는 이미 신앙심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또 하나의 험한 파도를 잘 이겨낼 만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남은 가족이 너무 안쓰러웠지만.
이제 할머니는 가셨지만, 정녕 우리는 할머니를 보내지 않았으니, 그분 세 아들의 가지에서 나온 열한 명의 손자 손녀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건강하게 무성한 열매를 맺으며 이렇게 잘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사순절에도 나는 성모 마리아님께 다가가 슬픔에 잠긴 그윽한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외유내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야말로 가장 완전한 구도자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그녀는 내게 조용히 속삭이듯 말한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우연히 접하게 되어 다시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