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드레스 정면.jpg


    

   드레스를 안 입어 본 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편한 옷, 편한 옷"하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티셔츠에 바지 입고 다니는 게 다반사다. 

   LA는 날씨가 좋아, 티셔츠 몇 개와 바지 몇 장만 있으면 어지간 한 데는 다 갈 수 있다. 조금 예의를 차리는 곳이라 해도, 티셔츠 디자인이 약간 특이하거나 색깔 배합만 잘 하면 눈쌀 찌푸리게 할 일은 없다. 

   조금 더 멋을 부리고 싶으면, 악세사리 천국 자바 시장에 가서 명품 카피 몇 개 사고 스카프 몇 장만 사 놓으면 입맛대로 연출할 수 있다. 여기다가 햇빛 가린다는 핑게로 디자이너 모자라도 하나 머리에 얹으면 파리잔느 저리 가라다. 

   이렇게 편한 옷 차림을 선호하다 보면, 자연히 신발도 편한 걸 찾게 된다. '사스' 신발 한 두 켤레 없는 중장년 여성은 없으리라. 가볍고 폭신한 착용감으로 중년과 노년들에게 사랑받는 신발이다. 요즘은 다자인도 제법 세련되게 나와서 무난하게 착용할 수 있다. 

   역시, 약간만 색깔과 디자인을 고려해서 구입하면 그런대로 바지와 구색을 맞출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한 신발을 너도 나도 신고 다니니 누군가의 입에서 '여포화'란 말이 나왔다. 풀이하여, '여자이기를 포기한 신발'이라는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편하면 됐지'하는 배짱으로 산다. 

    남자들 보기에는 편한 것만 찾는 여자의 복장이 저으기 심기를 불편하게 하나 보다. 한 번은 남편한테 무참한 봉변을 당했다. 급기야, " 당신, 엉덩이도 예쁘지 않는데 맨날 바지만 입어?"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호오, 이런 변이 있나. 불편한 진실은 말 그대로 불편하다. 처음 만났을 땐, 드레스 업한 나를 보고  "여왕 같으십니다!"하고 존경까지 표하더니 여왕님께 감히? 그 이야기는 전설따라 삼천리란 말이렸다.

   하지만,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간다. 옷이 편하면 마음도 쉬이 편해진다. 신체적 모욕과 인격적 모독을 받으면서도 잠시 감정이 출렁였을 뿐, 화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속으론 자기 변명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  ''앞태 챙기기도 바쁜데, 무슨 뒷태씩이나?"  때로는, 이런 넉살까지 부린다. "아내의 용모는 남편의 자존심이라더니, 나이 들어도 신경 쓰이는감?"

   나도, 한 때는 이멜다 여사가 왔다가 울고 갈 정도로 신발 욕심이 많았다. 옷하고 색깔이 맞지 않으면 발이 먼저 부끄러우니 어쩌랴. 예쁜 구두만 보면, 일단 사 둔다. 옷이 색색이니 구두도 색색별 있어야 될 거 아냐, 이게 구두를 부지런히 사대는 궁색한 변명이다.

   하이 힐 사이즈가  5.5, 발목까지 오는 앵클이나 부츠는 6이다. 사이즈가 작아서 자연히 프랑스제나 이태리제를 선호하게 된다. 앙증맞고 예뻐서 신고 나가면, 신발 예쁘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자연히 옷도 드레스 업하게 된다. 미니를 입었다가, 샤넬을 입었다가, 맥시를 입는다.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었다가, 끝자락이 찰랑거리는 인어 드레스를 입기도 한다. 팜트리처럼 죽죽 찢어진 프랑스제 치마를 입고 폼을 잡기도 했다. 

   드레스 업하고 조신한 행동까지 따르면 귀한 숙녀로 신분상승한다. 거기에 올림머리 하고 귀걸이 목걸이로 액센트를 주면 몇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귀부인 같다'며 추켜 세워 준다. 남편이 여왕 같다는 말을 한 것도 그때였다. 농담인 줄 알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귀부인이면 귀부인이지, 같다는 또 뭐람?" 짐짓 화내는 시늉을 하지만, 본 때 없는 인사도 속으론 쾌히 접수한다. 

   몇 사람의 경쟁자가 오는 곳이라면, 고급스런 앤틱 브로치를 어깨 가까이 하나 단다. 까만 챠이나 맥시 드레스에 실버 앤틱 브로치. 밤 바람이 차면, 실버 스파클링 탑을 걸친다. 별로 나쁘지 않다.

   전신 거울 앞에서 앞태 뒷태 점검을 다한 뒤, 만족스러우면 홀로 방긋 웃는 것으로 오케이 사인을 준다. 이런 게 즐거웠다. 홀로 연출해 보는 패션 쇼는 여성의 특권이요, 즐거움이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면서 얼굴도 몸도 슬슬 황성옛터로 변해가니 홀로 패션도 재미 없고 나가는 것도 시들해졌다. 파티라고 가 봐야, 같은 캐더링에  뻔한 가라오케. 노는 사람 놀고, 떠드는 사람 떠들고.여학생은 여학생끼리,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영양가 없는 대화에 영혼 없는 리액션, 게다가 술잔치에 여념 없는 남편님들. 술 마시고 떠드는 남편들을 위해 너댓 시간 죽이고 앉아 있는 건 기본이다. 정말 매력 없고 재미없다.

   심지어, 크루즈 여행을 가서도 여자는 밤늦도록 카지노요, 남자들은 한 방에 앉아 술잔치다.

이래저래, 외출에 흥미를 잃다 보니 옷 차려 입고 나갈 일도 줄었다. 있는 옷, 있는 신발이 다 장식품이 되고 전시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핑크 시대, 블루 시대로 나뉘던 피카소의 화풍처럼 중년 이후의 패션은 멋 시대에서 편리시대로 바뀌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내 눈에 삼빡하게 들어오는 드레스가 있었다. 빨간 드레스. 디자인은 아주 심플하고 흐르는 선도 단순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엘레강스하게 보였다. 게다가, 터진 옆선은 은근히 섹시하게 보이기도 했다. 통일 속의 변화가 미의 본질이라면, 약간의 이런 파격이 패션의 유머다.

   사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다시 한 번 이런 드레스를 입고 뽐내고 싶었다. 차려 입고, 오래도록 못 가 본 뮤직 홀에 가고 싶었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우아하게 식사도 하고 싶다.

   빨간 드레스에 까만 핸드백과 까만 슈즈, 차가운 밤공기를 가려줄 까만 스파클링 쇼올 하나만 걸치면 화려한 외출이 될 것만 같았다. 근 이십 년만의 외출인가. 왠지, 걸음도 날개 달린 듯 사뿐사뿐 가벼울 거란 환상에 잡힌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죽은 여성성을 되찾는 가벼운 떨림이 왔다.

   사? 말어? 가격도 $89, 채 $100이 되지 않는다. 모델의 몸매가 잠시 기를 죽였지만, 내 나이에 사이즈 6이면 괜찮지, 뭐. 유혹이 점점 강해진다. 

   사? 말어? 한참을 들여보다 이 글을 쓴다. 아직까지는 쇼핑몰 카트에 넣지 않았다. 잠자는 호수를 깨우는 건 바람만이 아니다. 한 방울의 물방울로도 잠든 호수를 깨울 수 있다. 

   빨간 드레스 한 벌로도 잠시 행복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