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페이스 북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기 탐구에 빠져있는 듯하다. 물론, 재미로 해 보는 일이긴 하나 컴퓨터 통계로 찾아내는지 맞거나 비슷한 경우도 많다.
채 일 분도 걸리지 않는 데다가, 손가락 하나로 클릭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 나도 재미삼아 눌러 보기도 한다. 생일꽃을 찾아보는 것도 그 중 하나의 방법이었다.
눌러 보니, Rose로 나온다. 장미? 그것도 붉은 장미라고? 친구들마다 꽃이름 하나씩 달아주던 성당 친구가, 나더러 '튜울립' 이라 했는데 여기선 '장미'란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섣달 스무 여드레. 띠 별로 따지면 겨울 토끼요, 별자리로 하면 물고기 자리다. 여기에 꽃으로는 겨울 장미가 보태진다.
인성은 카리스마 있고, 솔직담백 정직함에 관대하다나. 아마도, 페북은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덕담을 해 주려 작정한 모양이다. 나도 내재한 인성을 제대로 파악 못했는데 그들이 어찌 나를 알까.
하지만, 인간 누구나 저 나름의 자존심과 카리스마가 있고, 가급적이면 거짓됨 없이 정직하게 살려 애쓰고, 너그럽고 관대하며 보다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 그런 심성들을 조금은 지니고 있는 거 아닐까. 이제껏 절반의 이런 심성을 지니고 살아 왔다면, 10% 만이라도 그 쪽으로 저울을 더 기울게 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
내친 김에, 장미 꽃말을 찾아보니 굉장히 다양하다. 색깔에 따라서 다르고, 송이 수에 따라 다르고, 무슨 꽃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또 다르다.
빨간 장미는 욕망, 열정, 기쁨, 아름다움, 절정.
백장미는 존경, 순결, 순진, 매력.
노란 정미는 질투, 사랑의 감소, 완벽한 성취.
분홍 장미는 맹세, 단순, 행복한 사랑.
파란 장미는 얻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주황 장미는 수줍음, 첫사랑.
보라색 장미는 영원한 사랑, 불완전한 사랑.
흑장미는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무지개 장미는 꿈은 이루어진다.
초록 장미는 천상에만 존재하는 고귀한 사랑.
사람도 가지가지지만, 꽃색도 꽃말도 이처럼 많은 것이 놀라웠다. 특히, 초록 장미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천상에만 존재하는 고귀한 사랑'이란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꿈 꾸지만, 지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태성을 지녔나 보다. 꽃송이 숫자에 따른 꽃말도 재미있다.
빨간 장미 한 송이는 "왜, 이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44 송이는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119 송이는 "불 타는 내 가슴에 물을 뿌려 주세요!".
365 송이는 "1년 내내 당신을 사랑합니다!".
백장미 한 송이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100 송이는 "그만 싸우자. 백기를 들고 항복이야!".
노란 장미 한 송이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꽝이야!".
4 송이는 "배반은 배반을 낳는 법!".
노란 장미 24 송이는 "제발 내 앞에서 이사가 줘!".
분홍 장미 한 송이는 "당신은 묘한 매력을 지녔군요!".
누가 지어 놓았는지 정말 그럴 듯하다. 요즘은 긴 말 필요없이 아이콘 하나로 하고 싶은 말 전해 버리듯, 장미 꽃 색깔이나 숫자로 하고 싶은 말 대신 전하는 것도 로맨틱한 발상이겠다. 나는 옛님을 위해 백장미 한 송이를 뽑아 보내야 하려나.
꽃을 통한 삶의 이야기와 향기를 공유하는 사랑방 대부, 깜돌씨를 통해 한참 장미 공부를 했더니 색에 취했는지 향기에 취했는지 어질하다. 내 페북 사진 곁에 놓여 있는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다시 보며 미소 짓는다.
그리워도 만날 수 없는 벗님네들. 그 친구들 누군가가 내 페북 사진을 보고 달려와, "왜, 이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하고 반가움의 탄성을 질러주면 좋겠다. 이런 즐거운 환상에 빠져 보는 거다.
그런데, 겨울 토끼는 여지껏 누군가가 먹이를 건네주는 인덕으로 살아 왔는데, 겨울 장미도 또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온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난, 늘 이렇듯 의타적인 존재로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진다.
인덕과 신덕. 이건 내 삶을 지탱해 준 양대 버팀목이요, 가장 큰 신의 선물이다. 아마, 이런 은총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나를 가로 막던 험준산령을 넘지도 못했을 게다. 노도와 같이 굽이치던 강물인들 건널 수 있었을라고. 난 늘 이 인덕과 급하면 바로 찾아 주시던 신덕을 믿고 살아 왔다.
하긴, 누군가의 돌보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비단 겨울생인 나만의 특혜는 아닐 터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운명일지도 모른다.
장미여! 나의 겨울 장미여! 온 열정 다하여 우리 삶을 찬양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