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매일 일하면서 걷는다. 걷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숨을 쉬고 존재해야 할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몹시도 날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임재범의 ‘비상‘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랫말도 와 닿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꾸 듣다보니 따라할 정도가 되어 흥얼거리며 노래를 즐겼다. 왜 그렇게 날고 싶었을까.
어느 이른 아침에 내 몸이 붕 뜨기 시작했다. 난 양 팔을 옆으로 넓게 펼쳐 보았다. 드디어 날기 시작하더니 나를 제재하지 못한 채 신나게 날고 있었다. 높은 산도 어느새 훌쩍 오르고, 하늘과 넓은 바다 위도 훨훨, 거침없이 날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산골짜기 사이사이도 정신없이 오가고 빌딩과 주택 위도 마구 날아가고 있었다. 높은 계단도 오르고 또 내려가다가 내가 왔던 길을 찾지 못해 헤맸다. 점점 불안해졌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길을 못 찾아 엉뚱한 속력을 내며 방황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뒤에서 왼쪽 손목을 살며시 잡아주는 손길을 느꼈다. ‘누구야?’ 하고 묻는 순간 내 눈이 탁 뜨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였다. 남편을 불러 당신이 내 손목을 잡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난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하며 계속 머릿속에 누가 나를 깨운 것일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분명 내 손목을 잡는 어떤 손을 느껴서 내가 깨어났는데 남편 아니고 내 침상에 들어온 자가 없지 않는가? 나의 출근을 돕기 위해 열심히 도와주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당신이 내 손을 잡지 않았어?” “아니라니까”
<비상> 의 노랫말 일절은 이렇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 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 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 줘야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내가 날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이 이 가사에 다 들어있지 않는가. 꿈속에서 날다가 헤매던 내 모습이 이렇게 같을 수가 없다.
내가 매일 일하는 곳은 걸어야 하는 시간이 80 퍼센트 정도다. 환자나 보호자, 그리고 직원을 돕기 위해 걸어가야 하니까 부르는 대로 홀 안을 누비고 다닌다. 잠시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전화를 받을 때, 혹은 점심시간이나 컴퓨터에 환자의 물품을 입력할 때 외에는 앉아야 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병원 안 복도를 걸어가며 때로는 내가 롤러스케이트라도 타고 다니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이기도 하지만 빨리 도움의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때론 내가 날개라도 달려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고 싶었던 이유가 어디 그 뿐이었을까? 엄밀히 생각해보면 결국 속된 욕심이었다. 뭐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없다보니 괜히 노래를 잘하던가, 글을 아주 잘 써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것일까? ‘나’ 라는 존재를 내 안에서는 잘 볼 수가 없으니까 내 밖에서 나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뚜렷이 나를 내세울 것이 없이 나이만 들어가는 것 같아 남과 비교할 때 오는 헛된 꿈 내지는 허상이던가.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이 분명 내 손목을 잡았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머리를 스치며 깨우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내 손목을 잡아주던 그 손이 없었다면 아직도 난 꿈속을 헤매며 길을 찾고 있었으리라. 상공을 나르다 피곤에 지쳐서 어디에 부딪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난 오늘도 일하며 걷는다. 걸어야 할 사람이므로 잠시 꿈속에서만 새가 되었던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내 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난 이미 날고 있는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비록 날개는 없어도 맘껏 다니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걷기에 바르게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겁다. 역시 난 걸어야 한다.